상식에 反하는 수사가 합리적 의심만 키웠다[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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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의 청와대 現수석, 공소장에서 빼
검찰총장에게 ‘국회의원 등 청탁’으로 보고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심증은 가지만 입증이 어려워 진범을 사법처리를 할 수 없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거나 무고한 사람을 기소 또는 처벌하여서는 안 된다.”

올 8월 11일 부임한 박순철 서울남부지검장의 취임사 중 일부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쳐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法諺)을 연상시키는 문구 그 자체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 박 검사장은 직원들에게 “진술만 가지고 하면 안 된다. 진술은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부연 설명했다고 한다. 진술에 의존한 수사가 무죄로 이어져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역시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서울남부지검이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를 부른 라임자산운용의 사모펀드 사기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부 직원들은 박 검사장의 취임사에 “라임 사건 수사를 말하는 것 같은데…”라며 술렁였다고 한다.

박 검사장 부임 전인 올 6월 초 라임의 전주(錢主)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은 서울남부지검에서 금품 공여를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27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강기정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줄 ‘인사비’ 5000만 원을 이강세 전 스타모빌리티 대표에게 건넸다”고 처음 진술했다. 김 전 회장의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현금 5000만 원을 백화점 쇼핑백을 반으로 접어서 안이 보이지 않게 건넸다” “이 전 대표가 7월 24일 (금융감독원을 감독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여당 국회의원을 만났고, 7월 28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강 수석을 만났다”…. 지난해 6월부터 라임은 금감원의 사전조사를 받았는데, 김 전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금감원 조사를 무마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여당 인사에게 금품 로비를 시도한 것이어서 중대한 부패 사건이다.

검찰은 김 전 회장 진술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이 전 대표를 체포했다. 이 전 대표는 호텔에 간 사실, 김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처음엔 모두 부인했다. 검사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물증을 제시하고, 김 전 회장과의 대질 조사 끝에 1000만 원을 받은 사실만 인정했지만 그 돈의 명목은 강 전 수석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 전 대표의 배달사고인지, 강 전 수석의 금품수수인지를 신속하고, 철저하게 규명해야 할 갈림길에 선 검찰의 이후 수사 과정은 석연치 않다.

검찰은 이 전 대표에게 알선수재 혐의를 적용해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하지만 이 전 대표는 올 7월 초 알선수재가 아닌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영장 단계의 범죄 혐의가 기소 단계에서 종종 바뀌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알선수재는 돈의 전달 과정이 명확한 경우 돈을 받은 공무원까지 뇌물죄로 처벌된다. 하지만 변호사법은 알선한 부분, 그러니까 청탁을 받은 공무원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폭넓게 적용이 가능하다. 현직 청와대 수석의 수뢰 의혹을 입증해야 할 검찰이 기소 단계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구속영장에는 강 전 수석의 실명이 기재됐지만 공소장에는 강 전 수석의 이름이 빠졌다. ‘청와대 수석 등에 대한 청탁’ 대신 ‘국회의원 등’으로 수사 상황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강 전 수석은 박 검사장의 부임 전날인 올 8월 10일 청와대를 떠났는데 검찰은 첫 진술 이후 4개월이 넘도록 전직 수석에 대한 조사 없이 처분을 미루고 있다. 김 전 회장이 8일 법정에서 갑자기 강 전 수석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라임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상식적 수사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상식#구속영장#공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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