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권 실종 사태[횡설수설/김광현]

김광현 논설위원 입력 2020-09-29 03:00수정 2020-09-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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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금액이라도 손 베일 것 같은 빳빳한 지폐가 든 용돈 봉투를 주면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고 받는 사람도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서는 신권 지폐 인기가 더 높아진다. 은행 창구에서는 1인당 한정된 금액만 새 지폐로 바꿔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특이하게도 새 지폐가 아닌 5만 원권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요즘 시내 곳곳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는 ‘한국은행의 지급 중단으로 5만 원권 인출이 어렵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은행 창구에 직접 가도 원하는 만큼 5만 원권을 받기 어렵다. 사실 추석 이전부터도 시중에는 5만 원권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한국은행이 예년보다 적게 찍어서가 아니다. 찍어 내보낸 지폐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올 3∼8월 중 5만 원권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은 20.9%. 10장을 찍어 내보내면 2장밖에 다시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5년 이후 매년 3∼8월 5만 원권 환수율은 50∼90%대였고 작년만 해도 72.6%였다.

▷5만 원권 실종 사태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코로나19에 의한 사회적 거리 두기다. 회식이 줄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현금 자체를 꺼낼 일이 줄었다. 둘째는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다. 전쟁 위험이나 불황이 닥치면 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왕 현금으로 보관하려면 5000원짜리나 1만 원짜리보다 5만 원짜리가 낫다. 셋째 원인은 초저금리 현상이다. 은행에 맡겨둬도 이자가 붙지 않으니 차라리 집 안에 현금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달러, 유로, 엔화 등 세계 공통적 현상이다. 여기에 한국만의 사정을 더하면 증여세 등 세금 부담이 갑자기 크게 늘어난 일이다. 자금 추적이 가능한 은행에 맡기지 않고 현금으로 갖고 있다가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세금폭탄 회피 동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현금이나 금을 집 안에 보관할 수 있는 개인금고 제작업체들이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

▷화폐 발행액만큼이나 중요한 게 화폐 유통 속도다. 화폐 유통 속도가 2배라면 같은 금액이라도 화폐 공급 효과가 두 배로 올라간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나랏빚을 내고, 돈을 찍어 풀어봐야 부동산 같은 자산시장에 잠기거나 아예 개인금고에 묻혀버리면 돈을 푼 효과가 없어진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타나기 십상이다. 건강한 사람은 피가 잘 돌듯이 경제 체질이 튼튼하면 돈도 잘 돌아간다. 돈이 돌지 않는 경제는 ‘돈맥경화’에 걸린 것이다. 5만 원권 실종 사태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라고 하겠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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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원권 품귀 현상#화폐 발행액#화폐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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