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열, 분노, 평정… 한국에 적응하기[카버의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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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충격적인 사건들과 한국에서 사는 동안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등이었다. 사실 한국에 산 지 오래된 나 같은 사람은 신참 때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생활에 잘 적응해 오히려 본국에 가면 더 어색하단 말이다. 그런데 적응하는 기간은 꽤 길었다.

스위스 출신 심리학자 퀴블러로스 여사가 1969년 ‘사망단계’ 모델을 소개했다. 이 모델은 인간이 불치병을 진단받을 때 임박한 죽음에 직면하면서 생기는 심리를 설명한다. 그는 5단계를 소개하며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을 거쳐 마지막에 수용 단계를 지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외국인의 한국 적응 5단계는 이 모델과 비슷하다. 다만 첫 단계는 완전 다르다. 외국인이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끼는 감동은 부정이 아닌 희열이다. 한국에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너무 신기하고 신난다. 특히 서울 같은 활기 넘치는 도시에서는 감각이 과잉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신참 외국인과 대화를 해보면, 한글을 몇 시간 만에 다 배워서 한글의 과학성에 놀라거나 아기자기한 커피숍, 빠른 인터넷, 편리한 패스트푸드 배달 오토바이, 맛있는 한식 등 ‘국뽕’(과도한 국가 자부심)이 될 만한 것들에 놀라곤 한다.

그 뒤 두 달 정도 지나면 분노 단계로 넘어간다. 이쯤이면 한국과의 신혼 시기가 끝나고 애로사항과 불편을 겪다가 현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외국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불평하는 말들이 나온다. 커피숍은 너무 많다.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 인터넷이 빨라서 좋긴 한데 외국인은 온라인 쇼핑하기가 너무 불편하다. 인도에서 걷다가 오토바이와 충돌할 뻔해 폭발했다. 밥 먹을 때마다 바닥에 앉는 것도 불편하고 김치를 도대체 하루에 몇 번 먹어야 하나. 게다가 ‘달’ ‘딸’ ‘탈’은 다 같은 발음 아닌가? 살과 쌀, 개와 게를 어떻게 구별하나? 짜증난다!

외국인 친구로부터 이런 말들이 나오면 몇 달간 피하는 것이 좋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를 만나면 이제 협상 단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 단계에도 장단점은 분명히 있다. 그가 은행에 갔는데 번호표를 뽑으면서 머릿속으로 이렇게 협상한다. ‘세종대왕님, 오늘만 영어 능숙한 직원 앞으로 보내주시면 내일부터 한국어 공부를 다시 열심히 할게요.’ 다음 날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세종대왕을 욕하며 연락이 올 것이다. ‘오늘 나랑 은행 같이 가주면 커피 한 잔 사줄게.’ 다 처리하고 저녁 시간이 되면 또 ‘친구야 오늘 서양식 같이 먹으면 내가 사줄게, 제발 부탁해!’ 같은 연락이 온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정도 되면 우울증에 빠질 때가 온다. 개인적으로 이 4번째 단계를 어떻게 견디는지에 따라 장기 체류자가 될 가능성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반년간 가족과 고향 친구들을 보지 못해 외롭기도 하고 나 없이도 고향에서 가족들이 명절을 신나게 보내는 모습을 보며 불행해하거나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말을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느덧 이 시기가 지나면 기분이 다시 좋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균형을 찾게 되고 예민함이 없어진다. 한국말은 부담 없이 본인 판단에 편한 생활을 위한 만큼만 배우고 만다. 또 ‘아직 잔에 물이 절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면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답답한 점들도 익숙해지며 잊기로 한다. 이렇게 편하게 한국 생활을 하고 참고 귀국하면 역(逆)문화 쇼크의 5단계에 들어간다.

사실 지금까지의 한국은 해외에서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아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이 큰 선입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최근에 한류가 지구 사방팔방으로 퍼지면서 앞으로 한국에 찾아올 외국인들은 한류를 바탕으로 생긴 큰 기대를 안고 올 것이다. 특히 일본에는 ‘파리 증후군’이라는 정신병이 있다고 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랑의 도시’인 파리에 대해서 기대가 너무 커서 실제로 가보면 절망을 크게 느끼고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과 파리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적응의 첫 단계가 희열이 될지, 충격이나 절망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심리학자 퀴블러로스 여사#사망단계#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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