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시진핑, 드루와!” 트럼프의 위험한 손짓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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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가을이 왔다. 연일 비바람에 스산하기만 하다. 지난 봄 평양에서 열린 남측의 ‘봄이 온다’ 공연을 관람한 김정은의 말이 새삼 생생하다. “이번에 ‘봄이 온다’고 했으니 여세를 몰아 가을엔 결실을 가지고 ‘가을이 왔다’고 (공연을) 하자.” 그리고 어느덧 5개월, 가을이 다가왔다. 하지만 결실은커녕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지금의 한반도 정세다.

북한의 시간표대로라면 9월은 ‘김정은의 달’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공화국 창건 일흔 돌을 대경사로 기념한다”고 예고한 대로 9·9절에 대규모 열병식을 열어 자신의 ‘주동적 조치’로 이룬 업적을 자축할 예정이다. 그 앞뒤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맞아들이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주역의 연쇄 이벤트에 조역으로 들러리나 서줄 트럼프가 결코 아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4차 방북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트럼프는 이 계획을 전격 취소시켰다. 여차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북한 김영철의 서한이 원인이었다지만, 여기엔 9월을 내다보는 트럼프의 불편한 심사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이에 못지않은 결정적 요인은 트럼프의 ‘거래 본능’이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폼페이오 방북 취소를 알리는 트위터에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북한을 직접 겨냥하진 않았다. 그 대신 김정은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며 “곧 만나길 고대한다!”고 했다.

타깃은 이번에도 중국이었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에 관한 우리 입장이 훨씬 강경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예전만큼 비핵화 과정을 돕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내며 폼페이오 방북은 미중 무역분쟁이 해결된 이후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마치 떼쓰는 아이를 달래거나 야단치느니 부모를 학교로 부르는 게 낫다는 교사 같은 태도다.

북핵 문제와 미중 무역전쟁을 하나로 엮은 트럼프의 머릿속 회로는 좀체 이해하기 어렵지만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로 보면 뭐든 끄집어내 주도권을 잡는 협상전략일 수 있다. 구미는 당기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아예 판을 흔들어 예측불허로 만들거나 판을 더 키워 덤까지 챙기는 고약한 방식이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지난해 4월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였다. 트럼프가 만찬장에서 시진핑에게 시리아 폭격을 깜짝 통보하는가 하면, 시진핑이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던 바로 그 자리다.

트럼프는 당시 시진핑에게 이렇게 말했다. “큰 거래를 해보고 싶은가? 그러면 북한 문제를 풀어라. 그것은 무역적자를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무역적자는 눈감아 주겠다는 주고받기 제안이었다. 그게 통했는지 이후 중국은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했고, 그 결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냈다고 트럼프는 믿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시진핑이 변심했다는 게 트럼프의 인식이다. 중국이 은근슬쩍 제재를 완화하면서 북한의 탈선을 부추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어제도 중국의 대북 원조를 경고하며 ‘무역분쟁과 기타 이견들’을 시진핑과 함께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을 걸어 무역전쟁의 출구를 찾아보자는 은근한 초청장으로 읽힌다.

트럼프의 거래 유혹에 시진핑이 호응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두 나라의 ‘대국(大國) 기질’이 맞아떨어진다면 한반도는 미중 거래의 협상 칩이 되고 만다. 김정은이 더는 허튼 고집을 부려서도, 우리 정부가 엉뚱하게 북쪽만 바라보며 딴청을 부려서도 안 되는 이유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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