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원재]일본 방재훈련에 참가해 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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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장원재 도쿄 특파원
“진동이 느껴지면 식탁 다리를 꽉 잡으세요.”

‘지진체험차’ 안내를 맡은 소방관이 말했다. 잠시 후 진도 7(일본의 최고 진도, 한국 기준으로 10∼12)의 진동이 밀려 왔다. 바닥이 무너질 듯해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흔들림은 20초간 이어졌는데, 체감 시간은 그 몇 배나 됐다.

1월 말 도쿄의 한 공원에선 외국인 거주자를 위한 방재훈련이 열렸다. 48년 만에 최강 한파가 온 날이었지만 각국 대사관 관계자와 유학생 230여 명이 체육관을 메웠다. 취재와 체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체험을 고른 것엔 이유가 있었다.

기자는 2년 전 구마모토 호텔에서 진도 6강(한국 기준으로는 9)의 지진을 체험했다. 책상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침대가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려 엄두를 못 냈다. 나중에 복도 세탁실의 벽걸이 건조기가 바닥에 떨어진 걸 보고 모골이 송연했다. 직원 안내로 로비에서 쪽잠을 자면서 집이라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을까 자문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일본에서 지내면 재해는 일상이 된다. 그런 만큼 무감각해지기도 쉽다. TV에서 지진 속보가 나와도 진도 3∼4 정도(한국 기준으로 5∼6)면 그러려니 하고 만다. 대피 요령을 담은 책자가 왔을 때도 대충 훑어보기만 했다. 듣는 게 있으니 지진이 났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된다는 정도는 알게 된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는 걸 구마모토에서 절실히 느꼈다. 그러고도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특파원 임기가 끝나기 전 한번은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겠다 싶어 훈련장을 찾은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화재, 지진 등이 연달아 발생한 것도 참가 이유가 됐다.

이날 반나절 동안 무너진 건물에서의 환자 이송법, 의식불명 환자 대처법, 국지 호우 발생 시 대응 요령, 피난소 생활 요령 등을 배웠다. 유사 시 대비 훈련을 제대로 받은 건 제대 후 15년 만이었는데 세월과 함께 달라진 게 적지 않았다.

스마트폰 기상레이더 앱으로 구름의 움직임을 관측하면 집중호우가 언제 어디에 내릴지 알 수 있었다. 대피할 때 의사소통이 안 되면 통역 앱을 활용하라고 했다. 감염 우려가 있으니 의식불명 환자에게 인공호흡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의외였다. 그 대신 심장마사지를 하고 자동심장충격기(AED)를 활용하라고 했다. 훈련을 마치니 비상식량과 참고자료를 한 가득 안겨줬다.

함께 훈련을 받은 한국인 주부는 “일본에 온 지 4년 됐지만 훈련은 처음”이라며 “가족을 지킬 자신이 생겼다”고 했다. 방재훈련은 100번 보는 것보다 한 번 체험하는 게 낫다는 것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나중에 기자가 지진을 체험하는 모습이 NHK뉴스에 나온 걸 알게 됐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 감고 오만상을 쓰는 모습을 알아본 사람은 다행히 없었다. 실전 같은 훈련을 ‘우아하게’ 할 순 없는 법이다.

지난달 포항에서 지진이 난 뒤 통보까지 7분이나 걸린 게 논란이 됐다. 그런데 빠른 통보만큼 중요한 게 민간의 대처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날 주최 측은 “1995년 한신대지진 때 묻히거나 갇힌 사람 중 97.5%가 스스로 빠져나오거나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살았다”며 “자신을 스스로 구하는 자조(自助)와 이웃끼리 돕는 공조(共助)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와 지자체의 역할이라면, 적극 참여해 자신과 이웃을 지킬 능력을 키우는 것은 시민의 몫이라는 걸 실감했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방재훈련#외국인 방재훈련#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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