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신광영]‘골든타임 지휘관’의 예고된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신광영 사회부 기자
신광영 사회부 기자
2014년 세월호 침몰 때 승객 구조에 실패한 해경 김경일 전 경위의 재판 날이면 방청석 맨 뒤에 그의 20대 남매가 앉았다. 유족이 빼곡히 앉은 방청석 왼편과 달리 오른편은 두 사람뿐이었다. 남매는 피고인석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재판이 끝나면 서둘러 빠져나갔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둘 다 사범대를 나와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김 전 경위의 딸은 “저의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아이들이 비극을 당했는데 선처를 바라는 저는 교사 자격이 없는 거겠죠”라고 말했다. 김 전 경위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때 현장 지휘관이었던 김종희 소방경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다. 김 소방경은 건물 2층에 갇힌 인명 구조에 실패해 징계를 앞두고 있다. ‘2층 상황이 심각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신속히 대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에서 발견됐다. 그는 25일 전화 통화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진압 당시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은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촌각에 달렸던 ‘골든타임’에 해경과 소방의 말단 지휘관이었다. 김 전 경위는 34년 경력에 24차례 표창을 받았다. 김 소방경 역시 27년 근무하며 6차례 표창을 받은 베테랑이다. 두 사람 모두 아들이 뒤를 따랐다. 김 전 경위의 아들은 해경 전투경찰로 복무했다. 김 소방경의 아들은 현직 소방관이다.

구조 실패에 대한 두 사람의 해명은 비슷했다.

“평소대로 대응했고,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조치했으며,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김 전 경위는 세월호 안에 수백 명이 남아 있는 걸 알고도 우선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해경 배에 옮겨 태웠다. 퇴선 방송이나 선내 진입 등 승객을 대피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형 경비정(100t급) 지휘관이다. 주 업무가 불법어선 단속이었다. 인명 구조는 물에 빠진 사람을 몇 명 건져본 게 전부였다. 침몰하는 대형 여객선(6700t급)을 눈앞에 두고 그는 경험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김 소방경은 불길에 휩싸인 건물 옆 액화석유가스(LPG) 탱크에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1994년 12명이 사망한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스폭발 현장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119상황실로부터 ‘2층 구조’ 연락을 받은 뒤에도 가스통 지키기에 몰두했다. 3층과 옥상의 눈에 보이는 사람만 구조했다. 화재 초기 2층으로 가는 비상계단은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 모두 경험의 덫에 빠져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처럼 노련한 지휘관도 긴박한 현장에서는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최소화할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상급자의 몫이다. 그러나 상급자들은 책임 소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말단 지휘관이 모두 떠안는다면 참사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와 해경 지휘부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 전 경위가 유일한 정부 측 ‘책임자’였다. 당시 한 검찰 간부는 “300명 넘게 죽었는데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476명을 태운 6700t급 여객선의 침몰을 100t급 경비정 하나로 막아서야 했던 해경의 인명구조 체계는 세월호 침몰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번 제천 화재 역시 현장 지휘관을 끌어내리는 ‘한풀이식 정의’로는 화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2014년 김경일, 2017년 김종희에 이어 참사 때마다 실패한 지휘관이 양산될 뿐이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골든타임#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김종희 소방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