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하준경]‘최저임금 1만 원’으로 가는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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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하한선 높았던 폴란드-헝가리의 구조조정 성공사례… 한국서도 통할까
창조적 파괴와 침체 둘다 가능
구조조정 필수라면 성공여건 만들어야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최저임금 인상폭을 두고 막판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소상공인, 노동자 모두 절박해서 더 어려운 협상이다. 지금은 ‘약자들의 골육상쟁’ 구도를 함께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이라는 큰 그림을 놓고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옛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구조조정 경험을 살펴보자. 사회주의 몰락 이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 지역에서는 최저임금제도가 미비해서 평균 실질임금이 이전의 45% 수준까지 하락했다. 반면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최저임금 수준을 국가가 보장했기 때문에 평균 실질임금이 과거의 80%까지만 하락했다.

10년 후, 더 나은 성과를 보인 건 임금 하한선이 높았던 폴란드 헝가리였다. 임금 부담 때문에 비효율적 국영기업들이 정리됐고 실업률은 15%까지 올랐다. 하지만 실직자들은 국가 지원으로 버티면서 더 효율적인 부문으로 옮기거나 창업을 했다. 경제는 신속히 구조조정됐고 총생산과 임금은 U자형으로 성장궤도에 진입했다. 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임금이 크게 하락한 덕에 비효율적 기업들도 오래 살아남았다. 총생산은 L자를 그렸고 구조조정은 더뎠다.

이렇게 최저임금이 경제에 실질적 제약으로 작용했던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노동시장에서 가격조정(실질임금 하락) 대신 수량조정, 즉 노동의 재배치가 일어났지만, 그렇지 않았던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는 탄력적인 가격조정 때문에 기존 기업의 수명은 연장됐어도 자원의 재배치는 부진했다.

현실에서 가격이 통제돼서 수량조정이 일어나는 사례는 꽤 많다. 예컨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이 가격 아래로는 돈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시중에 나오는 돈의 양을 조절한다. 돈은 사람과 달리 자리를 재배치하기 쉬워 조정이 원활해 보일 뿐이다. 최저임금도 의도하든 안 하든 강력한 조정수단이 된다. 이를 인정한 후 더 나은 길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다.

만약 최저임금위원회가 최저임금의 획기적 인상을 선택한다면 한국 경제는 어떻게 조정될 것인가. 장밋빛 시나리오부터 생각해보자. 영세 자영업이 구조조정되면서 고질적인 과당경쟁이 사라진다. 살아남은 자영업자는 수요 기반이 넓어져 매출이 는다. 과다한 임대 수요가 줄어 임대료가 하락하고, 자영업자는 ‘을’의 지위를 벗어난다. 늘어난 실직자들은 복지 혜택으로 일시적 고통을 견디다가 재교육과 구직 지원 덕에 더 나은 일자리를 찾거나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창업에 도전한다. 침체된 기업생태계가 다이내믹해진다. 결국 노동자들의 소득과 생산성이 높아져 내수가 회복되고 성장률도 오른다. 창조적 파괴라 할 만하다.

잿빛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파산하는 가운데 자본력이 센 프랜차이즈들이 살아남아 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재편한다. 임금 부담은 상품가격 인상으로 소비자들에게 전가된다. 혹시 임대료가 내려도 이득은 협상력 강한 프랜차이즈 본사가 흡수한다. 점주들은 여전히 ‘을’이다. 종업원 수가 줄면서 노동 강도는 더 세진다. 실직자들은 재교육과 구직 지원을 받지만 고부가가치 업종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창업은 실패한다. 구직자가 늘어나 중하위 수준의 임금은 최저임금으로 하향 수렴하고,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최고치를 기록한다. 영세 자영업은 가족노동 중심으로 다시 늘어난다. 복지 수요는 넘치는데 정부는 자영업 보조에 예산을 소진한다. 그나마 구조조정은 도루묵이고 경제는 침체된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와 그냥 파괴(plain destruction) 중 어느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지는 하기 나름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정도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어느 임계치를 넘으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구조조정을 각오했다면 좋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실직자 복지 확충, 재교육, 구직 및 창업 지원, 고부가가치 업종의 진입장벽 완화, 독과점 및 불공정 행위의 근절 등 많은 과제들이 선결 또는 병행돼야 한다. 준비가 덜 됐다면 일단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타협을 하되 앞으로 갈 길을 명확히 제시하면 된다. ‘최저임금 1만 원’으로 가는 길에서 맞닥뜨릴 구조조정은 피해서도 안 되지만 실패해서도 안 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최저임금#노동시장#최저임금위원회#영세 자영업자#최저임금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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