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87>커다란 나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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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나무
―김기택(1957∼ )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다
갈라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 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이전부터이미갈라져있었다는듯갈라진다
태곳적부터 갈라져 있는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헤아릴수도없이가보아서눈감고도알수있는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에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이 나무는 백양나무나 메타세쿼이아처럼 몸통이 곧고 훤칠한 나무는 아닌 듯하다. 느릅나무일까. 사람의 눈이 쉬이 닿는 높이부터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그 가지에서 또 가지가 갈라져 나오고, 거기서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는 잔가지로 우듬지를 이루는 나무. 나뭇가지들이 세세히 보이니 아직 나뭇잎 무성한 계절은 아니리라. 화자는 유난히 가지 많은 한 그루 커다란 나무에서 맹렬한 생식력을 보고, 징그러움과 동시에 경탄을 느낀다. 나뭇가지가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단다. 과연 무통분만인 듯한 식물의 생식도 동물 새끼가 어미 몸을 찢으며 태어나는 것처럼 폭력적일 수 있겠다. 화자는 ‘갈라진다 갈라진다’고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점점 빠르게, 점점 세게!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지는’ 나무의 몸속에서, 고조되는 생명력에 휩쓸려 화자는 거의 환각에 빠진 듯하다. 그러나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지는 나무나 화자나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가 굳건하기에.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은 김기택 시를 읽을 때면 감지되는 그의 치열한 시 정신이기도 하다. 잔가지 빽빽한 그 나무, 이제 깊은 녹음(綠陰) 드리우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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