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86>령(零)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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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零)
―이현호(1983∼ )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조용히 오는 비 령(零)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나를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영하(零下)

때마침 너는 내 맘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령, 조용히 오는 비

밤새 글을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피란길에 부모를 잃은 꼬마소녀가 임시로 보호받고 있던 한 농가에서 군인에게 인계돼 기차역에서 저를 실어갈 기차를 기다리다가 인파 속으로 달려가 사라지던 프랑스 영화 ‘로망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어디선가 들리는 “미셸!” 소리에 “미셸!?”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다 순식간에 튀어나간 것이다. 미셸은 그 마을에서 소녀를 보살피고 사랑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소년의 이름이다. 소녀가 ‘미셸’이라는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문득 감정을 민감하게 자극하고 영혼을 움직이는 글자가 있다. 상상력을 건드리고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의 힘!

화자는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우연히 ‘조용히 오는 비 령(零)’을 발견하고 그 글자에 홀린다. 영(零)은 ‘떨어지다, 부슬부슬 내리다, 비 오다, 숫자 0’을 뜻하는 한자다. 첫 글자를 ‘ㄹ’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현재 우리글 문법의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굳이 ‘령’이라 함은, ‘영’보다 ‘령’이라는 발음이 더 생동감 있고 음악적이어서일 테다. 어쩌면 화자로 하여금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뜬눈의 밤’을 보내게 하는 사람의 이름이 ‘령’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하는 사랑하는 자의 고독이,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각으로 자우룩이 펼쳐진다.

황인숙 시인
#령#이현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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