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공짜로 얻는 안전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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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1990년대 중후반 런던 특파원으로 일할 때 취재차 두 번 이스라엘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항공기 탑승 전에 받는 보안검사가 엄청 까다롭다. 기관단총을 든 특공대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가방 안의 짐까지 모두 꺼내 하나하나 검사한다. 이스라엘에서 나올 때는 더하다. 체류하는 동안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는지도 조사한다. 귀찮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비행기 좌석에 앉는 순간 적어도 테러로 잘못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는다. 이럴 때 저절로 떠오르는 게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영국에서의 금융거래는 무척 까다로웠다. 처음 영국에 체류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돈을 은행에 입금해도 오랜 기간 거래로 신용이 쌓이지 않으면 체크(가계수표)를 발급받지 못한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1995년 베어링스은행 파산은 큰 충격이었다. 한 직원의 불법 파생금융상품 거래 때문에 232년 전통의 대형 은행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 영국에서 신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법이다. 우리는 금융기관이 먼저 고객에게 신용카드 발급을 권하는 나라, 숱하게 금융사고가 터지고 국민 대다수의 고객정보가 털려도 어느 금융기관 하나 문 닫는 곳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신봉승 씨(극작가·예술원 회원)가 쓴 ‘일본을 답하다’란 책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쇄국 일본의 개항을 이끈 페리 제독의 상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페리기념관을 찾았을 때의 일화다. 문이 닫혀 있자 자신을 태우고 온 택시기사가 관리소에 전화를 걸더니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 따위로 기념관을 관리해서는 국가의 수치 아닌가. 당장 달려와서 사죄하라”고 호통을 쳤다. 부리나케 달려온 담당 공무원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면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국가 위신 앞에서 당당한 택시기사, 책무 소홀을 부끄러워하며 사죄한 공무원이 부럽다.

영국에서 첫 증기기관차가 나왔을 때 시속 48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그것이 너무 빨라 승객이 달려드는 공기의 압력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어 죽을 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앤서니 그레일링의 ‘철학적 질문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래도 당시 빠름보다 안전을 먼저 걱정한 과학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지금 이 증기기관차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른 탈것을 이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안전은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다. 좋게 생각하면 신뢰하기 때문이다. 기차든 비행기든 여객선이든 튼튼하게 만들었을 테고, 고장 나지 않게 잘 정비했을 것이고, 규정에 맞게 화물과 승객을 실었을 것이고, 확실하게 점검했을 것이고, 자격이 출중한 사람이 안전하게 몰 것이라고 믿는다. 사고에 대비해 안전장치와 장비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나더라도 잘 훈련받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른다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고, 행여 미처 대피하지 못하더라도 국가가 나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월호 재앙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웅변한다.

어느 외신은 세월호 참사를 ‘절차의 결핍(absence of protocol)’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모든 면에서 지킬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배를 운영하는 회사도, 배 운항과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과 승무원들도, 배의 안전을 점검해야 할 ‘관피아’들도, 이들을 감독해야 할 공직자들도, 구조에 나선 정부도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았다.

절차를 지킨다는 것은 느리고, 불편하고, 귀찮고, 비용이 든다. 그 대신 안전을 얻는다. ‘안전 대한민국’ 만들기는 모든 부문에서 제대로 절차를 지키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세월호#안전#절차의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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