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황제 노역과 ‘청와대 노역’ 뭐가 다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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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내보내면 징계, 대통령 모시기는 벼슬”
특권의식에 국민 법감정 외면… 사법부 꼭 닮은 비서실 사람들
비리 바이러스에 公개혁 망할라
“환관정치 성공한 예 없다”50년 전처럼 직언할 사람 없나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황제 노역’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마침내 큰일을 했다. 좀처럼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국민적 공분으로 한데 묶어준 것이다.

공교롭게도 황제 노역의 주인공 허 씨가 “재산 팔아 벌금 내겠다”고 밝힌 4일 청와대에서 비슷한 모습이 연출됐다. 금품과 향응 수수, 기업체 법인카드 사용 같은 비리를 저질렀는데도 조용히 원대 복귀시킨 청와대 행정관 등 8명을 징계하라고 뒤늦게 각 부처에 통보했다는 거다.

청와대는 불경스럽게 여길지 몰라도 황제 노역과 ‘청와대 노역’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같은 노역도 일반인은 일당 5만 원, 재벌 회장은 5억 원이듯 똑같이 세금으로 봉급 받고 노역하는 나랏일도 부처에서 하는 것과 청와대에서 하는 건 급이 다르다는 점이다.

작년 11월 비리 행정관을 처벌 없이 돌려보낸 사실이 불거지자 청와대는 “청와대에서 원대 복귀하는 것 자체가 강한 징계”라고 오만을 떨었다. 청와대가 출세 코스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대놓고 청와대 근무는 아무나 못하는 벼슬임을 천명한 건 처음이었다.

관련자들이 특권의식으로 뭉친 것도 비슷하다. 황제 노역 논란이 터졌을 때 대법원의 첫 반응은 ‘판결에 아무런 위법함이 없다’였다. ‘사법부는 퍼펙트하다’는 무오류 확신과 ‘우리가 남이가’ 식의 봐주기 습성은 청와대와 놀랍게 일치한다.

경제수석실 행정관 3명의 비리가 처음 드러났을 때도 이정현 홍보수석은 “한 명이 소액의 상품권을 서랍에 넣어둔 것”이라고 축소 은폐했다. 지난주 비리의 주인공이 10명임이 발각된 뒤에야 김기춘 비서실장은 “청와대 기강을 먼저 세워야 각 부처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서실 기강을 확립 못한 자신의 오류는 축소 은폐하는 유체이탈 화법이다.

이들 특권층은 국민 법감정에 무지하다는 불치병도 공유하고 있다. 검찰은 “벌금만 내면 끝”이라며 황제의 비리 의혹을 그냥저냥 넘기고 갈 뜻을 비쳤다. 대국민 사과는커녕 “대통령을 모시는 입장에서 송구스러운 일”이라는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발언은 왕만 바라보는 사극 속 환관의 대사와 비슷하다.

청와대 노역사건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과거 정권의 교훈 때문이다. 5년 전 청와대 행정관 2명이 업자에게서 받은 룸살롱 접대를 청와대가 축소 은폐하려 한 사건이 터졌다. 청와대부터 정화(淨化) 기능이 깨졌다는 신호탄에 줄줄이 부패가 이어지면서 결국 이명박 정부는 2010년 40등이던 부패인식지수를 2012년 45등으로 추락시켰다. 공공 개혁은 박근혜 정부의 명운이 달린 국정과제다. 이번에 아무 짓도 안한 척 국세청 금융위원회 등으로 복귀한 이들이 벌써 ‘부패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수 있다.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언론이 미리 경고하고, 대통령이 무시했던 문제는 반드시 터지고야 말았다는 사실은 더욱 섬뜩하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 아들 문제가, 노무현 이명박 정부 때 형님 문제가 지적됐듯 ‘환관 권력’은 박근혜 정부 탄생 전부터 암운을 드리운 문제였다. 2012년 대선 직전 이상돈 당시 정치쇄신특별위원 등은 박 대통령의 최측근 4인방이 ‘문고리 권력’을 넘어 환관 권력으로 진화했다며 퇴진을 요구했다. 1998년 처음 박근혜 의원이 정치에 입문했을 때부터 이들 보좌진을 이끈 사람이 최근 ‘박지만 미행설’로 구설에 오른 정윤회 씨다.

다행히 2013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비서실을 간결화해 대통령 보좌 역할에만 집중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새누리당은 ‘군림하는 청와대’와 다른 모습이라며 환영 논평까지 내놨다. 그러나 8월 대통령은 김 비서실장 등을 임명하면서 “비서실이 국정운영의 중추기관”이라고 선언했다. 비서실이 내각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비서실 안에서도 ‘밤의 실장’과 낮의 실장이 암투 중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중국 역사를 봐도 환관 정치가 성공한 예는 없다. 군측간(君側奸·왕 옆에서 왕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간신)을 제거해야 정당 정치가 본연의 궤도를 걸을 수 있다.”

1964년 정구영 공화당 의장은 사실상의 부통령, 이후락 비서실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렇게 직언했다.

대통령이 용인술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면 교훈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 언론에 거짓말을 일삼고 청와대를 황궁처럼 성역화하는 환관이 득실대고 있다. 50년 전처럼 직언하는 이가 없다는 현실이 무섭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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