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헌진]재앙과 축복 사이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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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한국의 외교안보 책임자에게 다시 묻고 싶다. 한반도의 미래전략이 있습니까.”

고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난해 이렇게 물었다. 2004년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맞닥뜨린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를 회상하면서였다.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이 급격히 고조됐던 당시 한국 정부에는 대책이 없었다.

지난해 12월 장성택 처형 이래 북한 붕괴론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북한 정권교체, 내전, 대규모 탈북, 대량살상무기(WMD) 유출 등 급변사태 발생 가능성은 높아졌다.

같은 물음을 던져 본다. 현재 한국은 북한 급변사태와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혹자는 ‘작전계획 5029’를 떠올린다. 한미가 북한 급변상황에 시나리오별로 대응하도록 만든 계획이지만 안타깝게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고 전 권한대행도 “‘작전계획 5029’는 한반도 미래전략이 아닌 군사계획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외교적 파장 우려로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우리의 현주소는 암담하다. 2012년 류우익 당시 통일부 장관은 통일 염원을 모아 통일 재원을 마련하자는 ‘통일항아리’ 운동을 시작했다. 매년 1조 원에 이르는 남북교류협력기금의 미집행액 일부와 민간 차원의 통일성금을 모아 ‘통일계정’에 적립하자는 캠페인이다. 그해 통일부는 남북협력기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북한을 자극한다”는 반론에 밀렸다. 1년 반 가까이 무소식이다. 정권이 바뀐 뒤 슬그머니 뒤로 밀리던 통일항아리는 이제 깨지기 직전이다. 통일부가 관리하던 전용 홈페이지(unijar.kr)는 열리지도 않는다. 통일부 직원들은 ‘통일항아리’라는 표현도 조심스러워 한다. 민간단체인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 운동을 진행하지만 썰렁하기 그지없다. 7억여 원이 모였고 그나마도 법이 개정되지 않아 민간에서 관리한다. 현재 한국 정부의 통일 재원은 ‘0원’이다. 최근 외국의 한 전문가는 북한 급변사태 때 1000조 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북한과 차근차근 통일하면 돈이 별로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수천조 원어치라는 막대한 지하자원을 이용해 북한을 충분히 발전시킨 뒤 통일하자는 얘기다.

이런 꿈을 실현하려면 숱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이 반기면서 인구 8000만 명의 강한 이웃국가 탄생을 축복할까? 남한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을 어떻게 방지할까? 북한에 내전이 발생하면? 북한은 반세기 가까이 전 인민 무장화, 전 지역 요새화 등 4대 군사노선을 구축해온 군사강국 아닌가? 의문은 꼬리를 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통일을 눈앞에 두고도 서독은 점진적인 통일을 꿈꿨다. 동독이 안정되고 체제개혁이 된 뒤 국가연합 과정을 거쳐 민족 전체의 투표로 단일국가를 세우자는 ‘희망적 사고’를 했다. 하지만 국경을 전면 개방해 흡수합병하는 급진적인 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 두꺼운 구름이 독일 통일이라는 별을 가려왔다. 한순간 구름층이 흩어지며 별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별을 잡아챘다.” 통일독일 첫 외교장관인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이렇게 말했다. 전격적인 흡수통일이 없었다면 통일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실질적인 통일 준비에 전 국민이 나서야 한다. 정권과 장관이 바뀌었다고 통일항아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 각자 이념의 좌표가 어디에 있든 한마음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의 말처럼 “준비되지 않은 통일은 재앙일 수 있지만 준비된 통일은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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