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상훈]그 남자의 ‘관광버스 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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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기자
이상훈 경제부 기자
얼마 전 한 시중은행 부행장으로 승진한 A 씨와 식사를 함께했다. 은행원 생활의 절반 이상을 영업 일선에서 보낸 자타 공인 영업통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A 부행장은 영업 현장의 전설(?)을 자랑스레 얘기했다.

“하여간 그 시절에는 단돈 10원이라도 예금 더 끌어오는 놈이 최고였어요.” 도로가 뚫린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만 하면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땅 주인들에게 풀릴 보상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마을 인심을 사기 위해 농사일을 거드는 건 기본. 동네 아주머니들이 단풍놀이에 나서면 염치 불고하고 차에 올라 트로트 장단에 맞춰 ‘관광버스 춤’도 열심히 췄다. 넉살 좋은 영업 수완 덕에 가는 곳마다 예금유치 실적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가 영업 현장에서 뛰던 1980, 90년대는 국내 은행들이 ‘총성 없는’ 예금유치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축 캠페인을 벌이며 “대만의 가계 저축률은 30%가 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20%에 못 미친다”며 은행들을 독려했다. 근로자 우대저축, 재형저축 등으로 예금이자에 대한 세 부담을 덜어줬고 은행에 들어와 있던 ‘검은 돈’이 지하경제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1982년부터 검토했던 금융실명제 실시를 10년 넘게 미뤘다.

이처럼 저축을 강조하던 분위기는 외환위기 직후 한순간에 바뀌었다. 금 모으기 열풍이 채 가시지 않던 2001년 한국은행 정문에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건전한 소비가 필요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절약의 역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이듬해 한 신용카드사는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의 광고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2006, 2007년 주식형 펀드 열풍이 불자 은행 직원들은 적금에 가입하러 온 고객에게 “저축 대신 펀드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저축 영업으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A 씨도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예금유치 대신 카드·대출모집과 방카쉬랑스를 강조했다. 영업 환경 변화에도 발군의 실력을 뽐내며 승승장구했지만, 마음 한편은 늘 편치 않았다. “과당 경쟁이니 뭐니 해도 예금 유치 영업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늘 당당했어요. 내가 고객들 돈을 불려 준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지금은 글쎄요….”

너무 오래 가계 저축률이 세계 최저 수준에 머물러서일까. 동양그룹 사태가 최대 이슈였던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낮은 저축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국회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국책 연구원인 조세재정연구원은 “소득 하위 40%까지는 저축 여력이 없어 금융 비과세·감면 혜택이 고소득층에게 돌아간다”며 저축에 대한 세제혜택 폐지를 주장했다. 저축의 날 50주년인데도 흔한 홍보 캠페인 하나 없다.

서민들에게는 ‘저축하자’는 비현실적 캠페인보다 당장의 대출금리 인하가 달콤한 사탕이다. 이를 잘 아는 금융당국은 잊을 만하면 “제2금융권 대출금리를 내리겠다”는 홍보자료를 보낸다. 누구도 저축을 권하지 않는 시대, 저축 기사를 쓰는 기자조차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상훈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
#은행#영업#저축#소비#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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