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달라이 라마에게 듣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습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요? 심장이 그를 알아보고 팔딱팔딱 뜁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제 심장이 존자님을 알아보고 콩닥콩닥 뛰네요. 달라이 라마가 나를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으시며, 그건 네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찌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데, 당신 자신이 그 이름에 집착하고 있으면 당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겠냐고 천진하게 웃으시는 그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천진불이었습니다. 천진한 미소, 유연한 동작, 시원하고 묵직한 저음, 그는 몸놀림이나 표정이나 말투나 논리가 철든 어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아이였습니다.

왕궁 앞마당에서는 학승들이 ‘딱새’를 합니다. 어둠이 내렸는데도 ‘딱새’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딱새’는 스님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서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논박과 논증의 과정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왕궁의 앞마당에서 밤늦게까지 딱새가 용인되는 건 달라이 라마가 그 풍경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달라이 라마에게 이렇게 들었습니다. “거듭거듭 사유하고 분석함으로써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사견에 혹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왜 티베트 불교를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지요? 토론이 일상화된 서구문화에 영성을 보탰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토론은 이기기 위한 것이거나 남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지만, ‘딱새’의 과정은 토론을 통해 자기 편견을 깨고 전도된 사견을 없애기 위한 겁니다. 이기기 위한 토론은 내 것에 대한 집착과 다른 편에 대한 미움으로 갈등을 심화할 뿐입니다. 그것은 100분토론, 끝장토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딱새’의 과정에서는 물음 자체가 길입니다.

나는 천진불인 달라이 라마가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사실도 신선했습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환생이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지지요? 우리가 환생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 달라이 라마는 너의 업장이 두터워 명약관화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 거라고 예단하지 않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해탈을 이루는 방법에 거짓이 없다면 해탈을 이룬 사람이 설한 환생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달라이 라마에게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죽을 사람 앞에서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증거라고. 그는 죽음을 대면하고 명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죽을 때 마지막 의식이, 그 사람이 쌓은 업과 함께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연스러운 말투에 나는 그가 환생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생을 본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늘 테러의 목표가 되고 있는 법왕으로서 불안 없이, 분노 없이 어찌 저리 안정감이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예수를 승복시킬 수 없었듯, 갈기갈기 찢음으로 오시리스를 죽일 수 없었듯 티베트를 짓밟음으로써 티베트의 정신을 승복시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중국은. 오히려 고통을 겪으며 예수가, 오시리스가 부활했듯 달라이 라마를 통해 티베트의 지혜는 인도의 오지에서 세계를 향해 번져갑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다람살라#달라이 라마#딱새#토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