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범신]KTX ‘논산 훈련소역’ 왜 안 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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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어린 시절 나는 논산훈련소 인근에 살면서 탈영하는 훈련병을 많이 보았다. 상급자의 폭력까지 기강 확립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허용되던 시기의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훈련병들의 탈영 이유는 폭력적 군대문화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배가 고파서였다. 밖으로 배출돼 나오는 훈련소 ‘짬밥’의 경우, 장교식당에서 나오는 짬밥엔 뜯다 만 닭다리도 어연번듯이 나오는 참에 훈련병들 식당 짬밥은 멀떡국물뿐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곧잘 혀를 찼다. 절대빈곤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때에 비한다면 지금 훈련병들의 문화는 경이롭게 변했다. 탈영하는 병사도 없거니와 배고파서 탈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요의 시대’가 됐다. 그렇다고 우리의 국방을 짐 지운 젊은 병사들을 위한 사회문화적 예우가 충분한 건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홀대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KTX ‘논산훈련소’역이 설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사 중인 호남선 KTX에서 논산 인근의 역으로는 익산역과 공주역이 있을 뿐이다. 국방의 간성인 훈련소역을 배제한 것은 계획 단계에서의 ‘정치적인 고려’라고밖에 볼 수 없다. 논산훈련소는 일 년에 12만 명 이상이 입대하고 매주 1800여 명의 훈련병이 영외면회를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인근엔 항공학교, 국방대, 3군본부가 있고 우리 국방의 초석이 될 국방대학원은 시공을 앞두고 있다. 논산을 오고 갈 군인과 그 가족들의 수가 최소 연간 1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국가안보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한 부대 이동이나 군수물자의 수송은 또 어떻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예산 타령을 하면서 ‘훈련소역’을 배제한 걸 방치하는 것은 국방을 최우선시하는 정부나 집권당, 군 지휘부의 총체적 직무유기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당신들은 좋은 승용차로 왔다 갔다 할 테니 병사들이나 그 가족들은 버스나 완행열차 타고 고행하듯 오가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유사시에 군 지휘부의 요인들이나 이동해야 할 병사들이 차량 정체에 막혀 도로 위에 갇혀 있더라도 문제 될 거 없다는 뜻인가.

나는 대표적 문화시설인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극장’과 지하철역을 연계하지 않은 정책 입안자들을 ‘돌대가리’라고 욕한 적이 있다. 이번 경우도 똑같은 심정이다. 겉으로는 자주국방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치적인 논리만 따라가는 것이 나라에 대한 진정한 충성인지 되돌아볼 일이다.

요즘 나는 논산에서 살고 있다. 예절과 충절의 전통이 깊은 이곳에서 사는 일이 나는 늘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내겐 좋은 차가 있고, 그러므로 KTX를 이용할 일도 거의 없다. 그러니 내 주장을 사적인 욕심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훈련병을 면회 온 늙은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논산역에 내려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한 채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풍경을 보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늦었다면 간이역 수준이라도 상관없다. 나라를 위해 빛나는 젊은 날을 바치고자 입대한 훈련병들과 그 가족을 위해 ‘훈련소역’을 설치해 최소한 입대, 배출 날짜와 면회하는 날이라도 선별적으로 열차가 설 수 있게 하면 될 일이다. 그 어렵던 이승만 시절에도 논산훈련소가 있어 철도를 깔고 ‘연무역’을 만든 것이 정부였다. 국방, 특히 병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때에 비해 퇴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줄 한 상징으로서 ‘훈련소역’의 문제가 있다.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KTX#논산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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