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상근]계란도 자르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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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근 교육복지부장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그는 자신을 스파이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경력을 보면 이해가 된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 1967년 공채 5기로 수석 합격한 뒤, 국제 분야 기획업무를 맡았다. 이후 브라질과 미국(샌프란시스코 및 시카고)에 파견됐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북방정책을 담당하는 비서관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얘기다.

염 원장은 정부 부처, 기업, 대학의 초청으로 특강을 자주 한다. 단골 주제는 독일 통일, 그리고 한반도 통일이다. 지금까지 100회 정도 했다고 한다. 스파이 출신이라면서 특강을 시작한 날은 18일, 이화여대의 이화캠퍼스복합단지(ECC)에서 기자 지망생을 위한 ‘프런티어 저널리즘 스쿨’의 수강생을 만나는 자리였다. 주제는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그리고 한반도 통일’이었다. 독일 통일과 관련해서 무슨 내용이 잘못 알려졌다고 보는 걸까.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69년 10월 취임하면서 동서독 유엔 동시 가입, 인적 경제적 교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동독을 직접 방문하고 회담했다. 브란트의 이런 동방정책, 화해 협력정책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자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학자가 국내에 많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대북 경제지원을 뒷받침하는 논리였다.

염 원장은 이를 반박한다. 독일 통일은 화해협력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가 아니라 동독 주민의 시위를 거쳐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졌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화해 협력정책이 분단의 고통 완화와 민족동질성 유지에 기여한 점은 맞지만, 독일 통일은 △소련의 동유럽 포기 △동독 주민의 대규모 시위라는 여건에서 서독 정부가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움직인 결과라고 설명한다. 또 정상회담이 네 차례 열렸지만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주민을 위해 그리고 일정한 대가를 받고 지원한다는 원칙을 서독 정부가 끝까지 지켰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통일의 길에 들어선 시기는 염 원장이 현지에서 공사로 근무하던 때였다. 대사관 직원들은 독일 통일을 지켜보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이 중 하나가 1993년 10월에 만든 ‘동서독 교류협력 사례집’(771쪽)이다. 서독 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할 때 인권보호 조항을 넣도록 요구해 관철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염 원장의 설명이나 대사관 자료집 내용은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특강을 들은 학생들은 △평상시 생각했던 통일문제가 얼마나 일차원적인지 알게 됐다 △1차 자료의 중요성을 느꼈다. 잘못 기록된 2차 자료, 또 그 자료를 보고 재생산한 기록은 그릇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동독 내부의 시위가 큰 역할을 했고 서독이 무조건 경제 지원을 한 건 아니라는 부분이 흥미로웠다고 소감을 정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청소년 역사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고교생 응답자의 69%가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응답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교육현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역사 왜곡과 이를 둘러싼 논쟁은 6·25전쟁과 독일 통일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이념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생기기 쉬운 문제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잘못된 정보가 자리 잡으면 미래를 향한 방향이 잘못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국가적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많은가.

염 원장은 실향민의 얘기로 특강을 마무리했다. 냉면 한 그릇에 계란 하나를 다 넣는 식당 주인. 분단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서인지 계란을 둘로 자르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실체적 진실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songmoon@donga.com
#염돈재#독일#통일#역사 왜곡#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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