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내가 만난 전재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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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오피니언팀장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지난해 가을쯤으로 기억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시공사 대표를 그와 가까운 지인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다. 아버지 인터뷰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전 대표는 일과 관련 없이 기자를 만나는 게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대화를 나눠 보니 겸손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사회 문제들에 막힘없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디자인과 미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열정이었다. 도서출판 시공사의 성공이 가능했던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대화는 아버지 삶의 마무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전 전 대통령도 생을 마무리할 시점이다. 언제까지 살인마, 악마 소리까지 들으며 숨어 살아야 하는가”라는 기자의 말을 묵묵히 경청하던 그는 어느 대목에선가 “연세대 재학 시절 청와대에 있을 때 당시 한창이던 학생 데모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곤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열린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와의 재회는 없었다. 건네받은 명함엔 휴대전화 번호가 없었다. 그를 소개해준 지인도 알려주지 않았다. 전 대표 역시 아버지처럼 은둔의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 ‘조세피난처’로 뉴스의 중심이 된 그를 생각하며 그날 그 만남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에서 전 전 대통령만큼 평가가 갈리는 경우도 드물다. ‘학살자’에서 ‘경제를 살린 대통령’까지 나온다. 하지만 평가의 대부분은 비난 쪽이다. 그를 변호하는 지식인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그에게 5·17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수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민주인사와 학생운동가를 고문하는 인권유린이 자행됐으며 장영자(전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의 처제) 사건, 동생 전경환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 횡령 사건, 처남 이창석 사건(노량진수산시장 영업권 불법 인수와 관련한 공금 횡령) 등 권력형 비리도 줄을 이었다. 국제그룹도 전(全) 정권에 밉보여 해체됐다는 분석이 정설로 돼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 공과가 있듯 그에게도 공이 있다. 취임 직전 연도인 1979년 1693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GNP)은 그의 퇴임 직전 연도인 1987년 4548달러로 약 2.7배로 늘었다. 만성 무역적자는 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됐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 최고수준에 달했다.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되었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증언하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이 그의 결단이었다는 것 역시 정설이다.

아들의 ‘조세피난처’가 사회적 논란을 빚는 상황을 지켜보며 차제에 ‘전두환 시대’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본인이 국민 앞에 진정으로 반성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29만 원밖에 없다”며 호화생활을 즐기는 것은 국민 앞에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다.

그가 진정한 군인 출신이라면 제일 먼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어야 한다. 시민들로부터 돌팔매를 맞더라도 말이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광주 시민들도 용서하고 포용해주리라 본다.

검색해보니 전재국 대표 인터뷰 기사는 딱 두 건에 불과하다. 출판인으로서의 포부가 주 내용이다. 이 중 2001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말미에 “청와대에 살면서 만난 권력가들의 말년이 얼마나 초라한지 실감했다”고 스치듯 말한 대목이 나온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제 말년이다.

기자는 과거 전 전 대통령의 부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많은 예비역 장성들을 알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생을 마감한다면 국민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부모가 할 도리가 아니고, 부하들에게도 상관의 도리가 아니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전재국#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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