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과정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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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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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국제부 기자
정양환 국제부 기자
방글라데시는 개인적으로 그리 친숙한 나라가 아니다. 같은 아시아지만 높은 인구밀도나 빈국이란 점 말곤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1971년 파키스탄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거나 미성년자 성매매가 심각하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해외 언론의 주목도도 낮아 3년 넘게 국제부에 있었어도 관련 보도를 본 기억이 흐릿하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외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이달 초 방글라데시 국제범죄재판소(ICT) 수장이던 무함마드 니자물 대법관이 스스로 사임했단 기사다. 얼핏 봐선 뉴스거리가 되나 싶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 포린폴리시 등 여러 언론이 주목하며 분석을 쏟아냈다.

이들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니자물 대법관이 이끌던 ICT 때문이다. ICT는 이름과 달리 자국 내 전쟁범죄 척결을 목적으로 2010년 설립됐다.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속주 ‘동 벵골’이던 시절, 이 땅의 민초들은 파키스탄군 비호 아래 알량한 권력을 누리던 세력에게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갖은 탄압 아래 숨진 국민이 30만 명을 넘는다. 그러나 독립 뒤 4번이나 쿠데타가 터지는 혼탁한 정국이 지속된 탓에 관련자 처벌은 요원했다. 정치권 등엔 요직에서 떵떵거리는 전범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야의 산통 끝에 어렵사리 문을 연 ICT의 첫 재판 대상은 델와 후세인 사이디 전 의원이란 정치거물이었다. 1996년부터 12년간 의회에 머물며 현 최대 야당인 ‘자마트’ 당수까지 지냈다. 허나 조사결과 사이디는 1960년대 파키스탄 앞잡이 노릇을 했고, 양민학살에 관여한 증거도 발견됐다. 이달 말쯤 예상됐던 판결에선 극형 선고가 확실시됐다. 그런데 이 민감한 시기에 담당판사가 돌연 물러나버린 것이다.

니자물의 사퇴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폭로가 결정적 촉매가 됐다. 매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재판 도중 한 벨기에 국제변호사와 수시로 전화나 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방글라데시에선 판사가 ‘관련 없는 제3자에게 재판에 대한 의견을 듣는 행위’는 위법이다. 대법관은 “해외 판례 수집을 도왔다”고 해명했으나, 판결 문항이나 처벌 수위를 논의하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했다. 게다가 정부 고위층이 자주 전화해 진행 과정을 물어본 것에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까지 공개돼 니자물은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먼 나라 얘기지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무리 정의를 지키는 ‘올바른’ 일이라도 적절한 과정을 밟지 않으면 한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사이디는 어떻게든 벌을 받겠지만, 현 재판은 절차상 하자로 정당성을 잃었다. 정부 역시 재판관에게 ‘압력’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났으니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코노미스트도 승자는 아니다. 메일과 통화 녹취가 흘러나왔다는 건 누군가 불법 해킹 및 도청을 저질렀단 뜻. 그런 자료를 내밀고 원칙을 따지는 모양새도 궁색해 보인다.

실타래처럼 꼬였지만, 앞으로 진짜 놓쳐선 안 될 ‘과정’이 남아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와 사법부는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 더 많은 우여곡절이 벌어져도 끈질기게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갈 때 지금의 과오도 씻을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도 이를 지켜보고 지지할 책임이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그러나 정도로 돌아온다면, 결코 과정을 헛되게 하지도 않는다.

정양환 국제부 기자 ray@donga.com
#방글라데시#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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