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13>치료받기 위해 살 것인가, 살기 위해 치료받을 것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최철주 칼럼니스트
최철주 칼럼니스트
유목민 환자들의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 지방 병원에서 서울 병원으로, 다시 서울의 A 병원에서 B 병원으로 또 C 병원으로. 이렇게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환자들의 이동은 유목민의 옛날 생활 패턴을 연상시킨다.

KTX 고속열차의 운행시간이 짧아지면서 그 속도만큼 지방 환자들은 더 빨리 서울로 이동한다. 고속도로의 새로운 노선이 생길 때마다 서울 곳곳에 우뚝 선 암 병동이 블랙홀처럼 지방 환자들을 빨아들인다. 한때 미국과 일본 등을 헤매던 환자들이 한국 의료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깨달은 뒤 국내 병원 순례를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유목민 환자들의 삶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욱이 말기 환자들은 어떤 삶을 바라는 것일까.

KTX개통후 환자들 병원순례

계절이 바뀌고 낙엽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면 모두가 덧없는 상념에 빠진다. 나는 인터뷰 시간으로 밤을 선택했다. 누군가 가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밤이 안성맞춤일지도 모른다.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은 일요일 밤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적한 식당에 나타났다. 환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차분하다. 한국 의사이면서 미국 의사이기도 한 그의 경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얼마 전 작은 모임에서 이제 우리나라 환자들도 삶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기억해 냈다. 특히 말기 상태에서는 치료를 받기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살기 위해 치료를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언뜻 철학적인 어투로 들려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그 의미를 먼저 물었다.

말기땐 치료방법 스스로 결정을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곡기를 끊었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며 살았지요. 저는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부모와 내 대까지를 포함해서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멀리 가서 공부하느라 조부 등의 죽음은 직접 겪어 보지 못했지만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여러 가지 상황은 잘 알고 있습니다. 위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은 곁에서 지켜보았지요. 죽음은 자기가 맞이한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배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게 많이 달라졌는데 지금이야말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우리도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말은 현대 의학이 더는 어떻게 손볼 수 없는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을 그때부터 환자 치료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우리는 그저 의료기기에 묶여 목숨을 연장하는 일에 얽매이게 될 뿐이라는 강한 암시를 담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25년 동안 암 예방 연구와 치료에 전념해 왔다. MD 앤더슨 병원에 있을 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치료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에서 진료 활동을 펴 온 지 11년. 현재는 국립암센터 원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매주 2차례 폐암 환자 진료를 맡고 있다.

“말기 환자 가족이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환자를 아주 맡기겠습니다. 잘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요. 내가 ‘맡기면 나중에 찾아갈 게 없는데요’라고 답하면 가족이 몹시 당황합니다. 사실 그 단계에서의 치료는 본인이 하는 것이지요. 환자 본인이 치료를 그만둘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환자를 제쳐 두고 가족이 ‘불필요한 치료’를 결정해 버립니다. 특히 한 가족 안에서도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해 버려요.” 그가 환자에게 쏟아낸 ‘쓴 말’은 다른 의사에게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환자나 가족이 자주 묻는 게 ‘이번 항암제 치료하면 낫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좋아진다는 보장을 꼭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경우 미국 환자는 다소 부작용이 있지만 치료할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보입니다. 우리는 의사와 환자가 늘 치료의 주도권을 가지고 기 싸움을 합니다. 미국 환자는 충분히 설명을 들은 뒤 의사에게 다 맡깁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말하면서 진단과 처방까지 같이 하는 해프닝이 자주 벌어집니다. 아주 독특한 현상입니다.”

명의(名醫)로 소문난 그에게는 끝도 없는 민원과 부탁이 줄을 잇는다.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에서부터 생면부지의 보통 사람들이 온갖 사연을 풀어 대며 쫓아온다.

“우리나라는 VIP 신드롬이 심각합니다. 일부 환자들은 암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고 그래프까지 그려 가며 따지기도 합니다. 그 기를 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자가 앓고 있는 증상을 빠른 시간 안에 알아채려면 유도신문을 잘해야 합니다. 왜 왔습니까, 폐가 어떻게 나쁩니까, 어디서 어떻게 진단을 받았습니까 등으로 시작해서 치료 과정의 부작용까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과정을 밟아 갑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남의 차를 얻어 타고 험한 길에 들어서면 차멀미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운전한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항암제 치료 과정의 부작용도 환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오히려 수월하게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의 진료 요청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암환자 수술 만능주의 경계해야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다 찾아온 환자가 너무 많아서 그런 환자들은 1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처음 온 환자의 경우는 1∼2주 안에 진찰을 받을 수 있어요. 내가 원장이니까 수술도 잘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환자들이 꽤 있는데 나는 그런 선입감을 털어내는 게 힘이 들어요. 말기 환자들에게는 생존 기간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인데 환자나 가족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 맞느니 어쩌느니 하며 말들이 많아요.”

의사가 말기 환자에게 생존 기간을 통보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일을 되풀이해 왔다. 환자의 마지막 생애 정리를 돕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가 암 치료에서 수술 만능주의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도 그런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
#유목민 환자#KTX#병원순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