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끝별]세상 모든 을(乙)들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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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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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가을은 을(乙)의 계절이다. 세상 모든 갑(甲)들이야 ‘갑’ 노릇 하기 바빠 어영부영 틈새에 낀 가을 따위에 여념 없을 터. 이 가을이 가을인 것은 추풍낙엽이 낙엽의 일만 같지 않고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한 암시와 비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들의 궤도 아닌 궤도를 가늠하여 우리 삶의 궤도 없음을 잠시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 앞을 낙엽 한 잎이/바람에 불려 갑니다./방랑과 청춘과 사랑도/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나뭇잎은 궤도도 없어/바람결만 따라서 헤맵니다./숲 속이나 늪 속에 비로소 멈춥니다…”(헤르만 헤세 ‘불려가는 나뭇잎’)와 같은 구절이 가슴을 칠 때 우리는 비로소 가을에 든 것이다.

이렇게 가을에 들면 우리는, 먼지가 내려앉은 빈자리들을 새삼스레 닦으며 우리의 결핍과 결락을 다시 한 번 추스르기도 한다. 점점 길어지고 깊어지는 밤하늘에 돋는 달이나 별을 보며 가슴에 숨겨 두었던 것을 감히 들추어 보기도 하고 가까스로 그 무엇인가를 호명해 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우리들 가슴에 나이테 하나가 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렇듯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고독해질 때라야 가을을 타고, 가을을 앓는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추풍낙엽은 우리 삶에 대한 암시

그러니 그런 가을엔 우리 모두가 을(乙)의 자리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고 앉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올가을에는 우리들, 낮은 삶을 사랑하게 하소서! 벌써 물가나 언덕, 덤불숲이나 채마밭에서 각다귀, 귀뚜라미, 울새, 제비들이 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귀뚜라미에게 가을은 짝짓기의 계절이다. 각다귀들도 하루빨리 알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고, 제비나 울새도 더 추워지기 전에 따뜻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들이 부르는 가을노래는 다음 봄을 잉태하고 생명을 남기려는 사랑의 의지다. 죽음을 예감하는 쇠락의 절정에서 강렬한 사랑 혹은 삶에 대한 애착을 구가하는 소리들이기도 하다. 이 가을의 소리에 우리들 귓바퀴도 쫑긋쫑긋 나풀나풀 익어갈 것이다.

올가을에는 미래를 준비하게 하소서! 비로소 봄을 준비해야 할 때다. 버려야 할 것, 거둬야 할 것, 남겨야 할 것들을 헤아리고 선택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한 때다. 무엇보다 말 그대로 ‘큰 선택(大選)’의 날이 50일 앞으로 다가왔다. 검증과 비방과, 공약과 유세와, 지지와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말, 말,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서로의 명분과 비전과 이해관계들이 날카롭게 충돌하고 있다. 사칭과 소란 사이에 깃든 침묵에 귀를 기울여, 독이 든 말과 거품 낀 말과 거짓된 말들을 가려내고 거둬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힘들었던 과거를 거울삼아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실업과 불황, 위기와 침체, 반목과 갈등으로 나라 안팎은 물론이고 집안 안팎이 동요하고 있다. 이 동요를 껴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을 주소서!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따뜻한 체온을 주소서! 구수하고 쌉쌀한 가을햇살에서는 세상 모든 을(乙)들의 고투와 고통과 슬픔이 배어난다. 소슬하고 쌀쌀한 가을바람에는 세상 모든 을(乙)들의 땀과 한숨과 눈물이 담겨 있다. 그 쌉쌀하고 쌀쌀한 내음이 다음 봄을 기약하는 향기이자 노래일 것이라 믿는다. 높고 먼 가을 달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맑고 큰 눈이 있음을, 높고 먼 별들을 보면서 그 눈빛들이 전하는 비밀의 전언이 있음을 믿고 또 믿는다. 희망이라는 모질고도 환한 힘일 것이다.

그러니 가을에는 인간 본래됨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가을은 잎 이후의 씨앗을, 혀 이전의 심장을 헤아리게 하는 계절이다. 굳이 펜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들 마음 안쪽에 깃든 시심(詩心)을 거풍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오롯이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하루에 소비하는 두세 잔의 커피값에도 못 미치는 책 한 권, 시집 한 권을 사 드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예능, 드라마, 스포츠, 게임, 인터넷에 몰두하는 시간의 반에 반만이라도 책을 읽고 사색하고 사유하는 데 할애한다면 이 가을은 향연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굳이 “한국 사회는 인문정신의 회복에 힘써야 한다”로 시작하는 ‘인문학 선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굳이 ‘근대문학관이나 문학전문 도서관 건립’을 주장하지 않고 ‘서울 출신 문인 선양 사업’을 주창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을이었으면 한다.

올가을엔 사색하며 미래 준비를


올가을에는 이런 기도들을 기도(企圖)하게 하소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오직 낮게 자리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하시고, 인간됨의 근원을 잊지 않는 따뜻한 가슴을 주소서. 그리고 마음의 무릎을 꿇고 앉아 겸허한 모국어로 시의 마음을 노래하게 하소서. 가을이 깊을수록 우리 모두가 ‘가을(佳乙)’이게 하소서. 본디 모습으로 아름다운 을(乙)들이게 하소서.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가을#갑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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