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경제민주화 비웃는 공기관 낙하산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3일 03시 00분


금융감독원 간부(2급) A 씨는 지난해 3월 퇴직한 다음 날 시중은행 감사로 재취업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B 과장도 지난해 5월 퇴직을 한 지 20일 만에 한 기업체의 고문으로 들어갔다. 여야 의원들이 공개한 최근 2∼4년 중앙부처 고위공무원의 재취업 실태에서 드러난 사례다. 최근 4년간 금감원 1, 2급 출신 간부 재취업자의 90%가 시중은행 저축은행 증권·보험사 같은 피감기관의 감사 등으로 재취업했다. 공정위의 최근 2년간 4급 이상 퇴직자 중 58%는 대기업 자문역이나 로펌 고문직 등을 얻었다. 문화체육관광부나 교육과학기술부의 퇴직 간부 절반도 유관기관에 들어갔다.

공직자윤리법은 공무원과 공직유관단체 임직원이 퇴직 전 일정 기간 직무와 관련됐던 업체에 퇴직 후 2년간 취업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걸린 기관의 ‘로비 창구’나 ‘방패막이’가 되는 유착을 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부 기관은 퇴직을 앞둔 일정 시점에 ‘보직(補職) 세탁’을 해줘 업무 관련성 규정을 피해갔다. 지난해 10월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돼 ‘퇴직 전 3년간’의 직무 관련성을 5년으로 대폭 강화한 것도 이런 꼼수를 막기 위해서다. “지난해 시행된 재취업 규제 강화 이전의 일”이라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재취업을 심의하는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직무 관련성을 엄정하게 심사하지 않는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여전히 많다.

부실 저축은행 감사나 사외이사 중 상당수가 금감원이나 전직 관료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힘 있는 기관의 고위 공직자가 노후보장성 재취업을 염두에 두고 일한다면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민간으로 자리를 옮기면 과거의 부하들을 상전처럼 모셔야 할 판이라 현직에 있을 때부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하기 쉽다. 이래서야 공기관의 위계와 지휘감독 체계가 제대로 서기 어렵다. 자신들이 낙하산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있는 민간단체나 대기업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신세질 가능성이 적은 중소기업에는 원리원칙대로 할 소지도 크다.

한국 경제는 과거 관치(官治) 금융과 정경유착을 통해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모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전현직 공직자들이 전관예우의 관행을 통해 부패와 도덕적 해이의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퇴직 공무원을 통해 유지되는 공생의 부패 고리를 끊지 못하면 ‘시장 실패’보다 폐해가 큰 ‘정부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부당한 정부 개입을 차단하는 일이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가는 길이다.
#경제민주화#공기관#낙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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