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상근]우리가 듣지 못한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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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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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근 교육복지부장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미국의 세인트피터스버그타임스는 ‘한밤의 절규(A cry in the night)’라는 기사를 세 차례 보도했다. 1986년에는 4회 시리즈로, 1988년에는 10회 시리즈로 신문에 게재했다. 2008년에는 온라인용 특집으로 올렸다.

기사는 캐런이라는 36세 여성이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사건을 다뤘다. 1984년 5월 22일 비가 내리던 밤, 온몸을 난자당했다.

성범죄 잇달아 국민들 불안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결혼을 앞둔 때였다.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외모. 유명인이 아닌데도 신문사가 같은 사건을, 같은 제목으로 계속 보도한 이유는 뭘까.

캐런은 숨지기 직전에 비명을 질렀다. 서너 블록 떨어진 이웃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두 달랐다. 다른 사람이 할 테니까, 고양이 울음과 비슷해서, 잠시 다투는 듯한 느낌이어서…. 어느 주민은 소리를 저렇게 길게 지를 정도로 폐가 튼튼하니 흡연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캐런이 격렬하게 맞서고, 도망치려 애쓰고, 도움을 요청하던 순간에.

취재기자인 토머스 프렌치는 자기 일이 아니면 무관심한, 이웃을 노리는 범죄에 무감각한 세태를 먼저 지적한다. 초점은 가해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듯한 사법체계로 이어진다. 배심원 선정, 재판부 교체 요구, 증인 신청 과정을 지켜보며 피해자의 가족이 느끼는 답답함을 전한다.

범인은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법을 내세워 자신을 최대한 방어한다. 피해자의 가족은 손을 쓸 수 없다. 피해자 가족이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으니 다른 진술을 미리 들으면 곤란하다고 변호인이 주장하자 판사가 이들의 방청을 제지한다. 변호인이 캐런의 일기장을 이용해 사생활이 복잡함을 암시하려는 전략을 내비치는 대목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성범죄 기사가 국내 언론에 매일 보도된다. 동아일보만 해도 이번 주에 △또 성폭행에…알바 여대생이 스러졌다 △전자발찌 찬 채 성폭행하려다 이웃주부 살해라는 제목으로 이틀 연속 A1면에 실었다.

지난달에는 경남 통영에서 10세 여자 어린이가, 제주에서 40대 여성 탐방객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두 건 모두 성폭행과 관련이 있다고 경찰은 추정한다. 강간미수범이 학원에서 여 중고생과 상담하고 배움터 지킴이가 초등학생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사건은 갑자기 늘었을까. 아니면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데 언론이 집중보도했을까. ‘치안전망 2012’(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에서 5대 범죄의 발생건수 통계를 읽다가 놀랐다.

강간은 2001년 6751건에서 2011년 1만9573건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강도는 5692건에서 4126건으로, 폭력은 33만8045건에서 30만4882건으로 줄었다. 살인은 1051건에서 1251건으로, 절도는 18만704건에서 28만2525건으로 늘었다. 강간사건의 증가 폭이 두드러진다.

강간범죄 10년 만에 3배로 늘어


경찰은 여성을 노리는 강간범죄가 2007년에는 1시간 12초에 1건씩 생겼지만 2011년에는 28분 54초마다 일어난다고 분석했다. 강간범죄의 신고율이 3% 미만으로 추정된다니 현실은 훨씬 심각하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법은 가해자에게는 가깝고, 피해자에게는 멀다. 성폭행당하고 자살한 여대생의 아버지가 “기물을 부숴 현행범으로 유치장에 들어가서라도 (가해자를) 만나야겠다”며 딸이 일했던 피자가게를 뒤엎었다고 한다. 가해자 못지않게, 피해자와 가족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이 집행되기를 바라는 건 기자뿐일까.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songmoon@donga.com
#오늘과 내일#송상근#성폭력#성범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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