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덕환]광우병, 과학과 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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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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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서강대 교수 대한화학회 회장
이덕환 서강대 교수 대한화학회 회장
광우병의 검은 먹구름이 다시 몰려오고 있다. 하필이면 촛불시위 4주년을 며칠 앞두고 전해진 미국의 광우병 소식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광우병 젖소의 등장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미국 소비자와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광우병에 대해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신중해야 한다. 억지와 궤변, 괴담과 촛불에 혼쭐을 놓아버리는 일을 반복할 수 없다.

4년전 촛불시위 재연될까 우려


황당한 괴담에 시달렸던 정부가 벌써부터 ‘과학’을 들먹이고 있다. 즉각적인 검역이나 수입 중단은 ‘과학적 근거를 갖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방침인 모양이다. 어쩐지 정부가 4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국민의 생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광우병의 진실은 과학으로 가려내야 한다. 미국에서 발생한 돌연변이에 의한 ‘비정형(非定形) 광우병’의 정체가 무엇이고,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는 명백하게 과학이 풀어야 할 문제다. 과학이 정치적·이념적으로 오염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하지만, 과학을 정치적 목적으로 부당하게 이용하는 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광우병 문제는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008년 광우병 사태의 경우에도 과학이 핵심은 아니었다. 과학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근거 없는 괴담이 마구 쏟아져 나온 후에야 뒤늦게 등장한 힘없는 조역이었을 뿐이다. 과학을 핑계로 아무 힘도 없는 검역 당국에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 된다. 광우병 문제가 해결된 것은 과학적 안전성 때문이 아니라 절대 불가능하다던 재협상 덕분이었다.

이번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 차례나 광우병이 발생한 미국의 쇠고기가 ‘100%’ 안전하다는 과학적 근거는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기대하듯 ‘99.9%’의 과학적 안전성으로 만족할 수도 없다. 결국 광우병 문제에 관한 한 과학의 한계는 분명하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괴담을 잠재우고, 성급한 언론의 오보를 바로잡는 것이 현대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명백한 정치·외교·통상 문제를 공연히 과학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월령(月齡)’이나 ‘특정위험물질(SRM)’처럼 낯선 전문용어를 들먹인다고 광우병 문제가 과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월령 30개월이나 특정위험물질은 현실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기준일 뿐이다. 광우병의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는 변형 프리온을 찾아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육안 검사가 과학일 수도 없다. 광우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된 바로 그 젖소의 고기나 가공제품이 국내로 유입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다.

과학으로 해결될 일 아니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즉각 수입을 중단하겠다던 4년 전 정부의 약속은 모두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와서 ‘국민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면’이라는 문구가 생략됐다는 변명은 옹색하다. 현실적으로 즉각적이고 일방적인 검역 중단이 어렵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즉각적인 검역 중단 요구에 담겨 있는 진짜 뜻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미리부터 ‘통상마찰’을 들먹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저자세에 대한 불만이 핵심이다. 신뢰할 수 없는 미국의 광우병 ‘예찰’ 시스템을 개선해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돈을 내고 구입하는 쇠고기의 품질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요구다. 정부가 미국에 속절없이 끌려다니고 있다는 우리 국민의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공연히 우리를 과학도 모르고, 국제 교섭의 기본도 모르는 어리석은 국민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 대한화학회 회장
#시론#이덕환#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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