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민심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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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7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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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이해찬 전 국무총리(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가 작년 12월 27일 나꼼수 멤버인 주진우 기자 소속 주간지 ‘시사IN’과 인터뷰한 내용이 충실해 갈무리 해뒀다. 그는 4·11총선에 대해 “한나라당이 몰락할 것이고, 총선에서 지면 박근혜 대세론은 더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의 영남 패권주의가 무너지고, 충청에서도 발을 못 붙이는 상황”이라는 진단이 첨부됐다. 불과 석 달 보름 뒤의 일을 하나도 못 맞혔다고 비웃을 수는 없다. 그땐 그런 예상이 이상하지 않았다.

‘선거판을 읽는 최고의 전략통’이라고 잡지에 소개된 그는 자신의 총선 출마에 대해 “별 생각 없다. 배지 없으면 진두지휘 못하나?”라며 “집권하면 또 총리 하면 되지, 아니면 대통령 자문위원장 같은 거…”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80여 일 뒤인 3월 19일 그는 세종시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 교수인들 3, 4개월 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또 자신의 생각은 어떻게 바뀔지 충분히 알까 싶다.

이 전 총리는 “2016년에 다시 총선이 있는데, 이때 진보진영 집권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나라당을 궤멸시키자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는 첫 집권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나라당 후신인 새누리당에서 좌파진영을 궤멸시키겠다는 야심가를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민주통합당에는 “당한 만큼 되갚겠다”고 공언하는 인물이 적지 않다.

‘대세 無常’ 보여준 4·11총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탄생하기 10개월 전인 2002년 2월 22일 민주당은 대선후보 경선의 막을 열었다. 김근태 김중권 노무현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7인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인제 대세론이 다른 사람들을 들러리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3월 16일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깜짝쇼처럼 돌출했다. 노무현 시대의 서막이었다. 반대편에선 이인제 대세론보다 강력한 이회창 대통령론이 비등했지만 결국 노무현 신풍(新風)이 이회창 재수풍(再修風)을 삼켜버렸다.

지금 민주당의 중심세력은 2007년 12월 19일 이명박 압승에 패주한 친노(親盧)폐족이다. 하지만 이들이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 부활하기까지는 2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야권은 작년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정권을 탈환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로부터 5개월 반, 총선 민심은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의 거야(巨野) 견제론에 쏠렸다. 박원순 득세에서 한명숙 퇴진까지의 야권 부침(浮沈)에 반년도 안 걸렸다.

외설과 저주의 김용민 막말이 투표 8일 전에 불거져 결국 유권자 선택의 마지막 재료가 됐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어떤 전문가의 선거 예측보다도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 며칠 사이 ‘정신적 집권세력’ 민주당이 보여준 것은 도덕성도 위기관리능력도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이 무능하며 부도덕하다고 심판하기엔 민주당의 김용민 대응이 과거 노무현 정부의 독선과 실정(失政)을 먼저 떠오르게 했다.

새누리당은 작년 12월 19일 비상대책위 체제를 공식가동한 지 4개월 만에 자신들부터 놀랄 성적을 거두었다. 위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리는 “총선을 이기는 쪽이 대선을 이길 확률이 크다.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서로 다르면 국가 운영 자체가 어렵고 대통령 리더십이 약해진다는 걸 우리 국민도 이젠 충분히 안다”고 풀이했다. 새누리당의 승리를 점쳤더라도 그렇게 말했을까.

총선 결과를 놓고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민심이 쇄신을 긍정적으로 봤다는 신호’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야권이 방심하지 않고 낮은 자세를 지키며 이정희 경선 여론조작, 김용민 망언 등에 정도(正道)로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어땠을까. 새누리당은 상대 실책의 반사이익을 보았다. 표심에는 또 지지자들의 고뇌와 갈등이 배어있을 것이다.

바둑을 두는 상수(上手)보다 관전하는 하수(下手)의 눈이 더 밝은 경우가 많다. 누구나 구경꾼일 때는 냉철할 수 있으나 당사자가 되면 상황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정치도 직접 뛰는 사람은 무언가에 홀리고 정신이 흐려지기 쉽다.

박근혜, 심판대에 먼저 올랐다

오만과 독선과 아집은 ‘패망의 보증수표’라는 것이 동서고금의 경험칙인데도 일단 득세하거나 인기를 얻으면 알게 모르게 변한다. 권력에 취해 총기가 흐려지고 ‘당신은 다릅니다!’라는 속삭임에 눈과 귀가 먼다.

이제는 새누리당이 정신적으로 정권을 재창출한 느낌일 수 있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새누리당이 심판대에 올랐음을 뜻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위험한 쪽은 야권이 아니라 새누리당이다. 불과 4, 5개월 전 득세한 민주당의 총선 실패는 역으로 12월 19일 대선까지 8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려준다. 민심은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민심#선거#대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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