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내 이름은 필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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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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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국제부 기자
정양환 국제부 기자
지난해 모로코는 독특한 의미로 ‘태풍의 눈’이었다. 아랍의 봄이란 거대 물결에 휩쓸렸지만 비교적 핏빛 희생은 크지 않았다. 다른 정권들이 총칼로 권력 유지에 집착했던 것과 달리 발 빠르게 변화를 수용한 결과다. 이 때문에 일부 서구 언론은 모로코의 개혁을 ‘명예혁명’이라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무함마드 6세 모로코 국왕의 대처는 매우 기민했다.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지 한 달여 만에 개헌을 공표했다. 왕의 권력을 상당 부분 정부에 이양하고, 조기총선으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현 압델릴라 벤키라네 총리 정권이 그렇게 탄생했다.

새 정부에 대한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중도를 표방한 벤키라네 총리는 “이슬람 율법에 얽매여 민생을 놓치진 않겠다”고 공언했다. 민의가 요구하는 경제발전과 청년실업 타파에 주력하겠단 뜻이다. 총리의 소탈함도 인기에 한몫했다. 으리으리한 관저를 마다하고 야당 시절 살던 집에 머무른다. 경호나 의전에 드는 비용도 대폭 줄였다. 시내 카페에서 즉석 공청회를 열어 시민과의 대화를 자주 갖는 것도 호감을 샀다.

이제 모로코의 앞날엔 장밋빛만 가득할까. 안타깝게도 많은 정치 분석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굳이 따지면 모로코의 개혁은 사람은 그대로인데 화장만 예쁘게 고쳤을 뿐”이라며 “근본적인 변화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 벌어진 ‘아미나 필라리’ 사건이다.

아미나 필라리는 10일 자살한 16세 소녀의 이름이다. 그는 1년 전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법원은 형법을 근거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결혼을 종용했다.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로코 법도 범인이 피해자와 부부가 되면 죄를 면할 수 있다. 필라리의 부모는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적 눈총이 두려워 울며 반항하는 딸을 떠밀었다. 이런 결합이 행복할 리 만무할 터. 자신을 거부했단 이유로 남편의 상습 폭력에 시달리던 필라리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필라리의 슬픈 사연은 즉각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로코 시민단체 1000여 명은 15일 페이스북에 ‘우리는 아미나 필라리다’란 그룹을 만들었다. 그룹 안내문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사라질 때까지 모두 아미나 필라리란 이름을 쓰겠다”라고 밝혔다. 지지 의사를 밝힌 누리꾼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던 시민운동가 나빌 벨카비르 씨는 “모로코에서 가장 핍박받는 계층은 다름 아닌 여성”이라며 “그의 죽음은 정치적 과실에 취해 멀고 먼 민주주의의 길을 잊고 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모로코의 개혁을 평가 절하할 순 없다. 왕권이 유지돼 부정부패 척결이 어렵단 지적도 있지만 원래 개혁은 한입에 배부를 수 없다. 모로코의 ‘첫 삽’은 부족할지언정 나쁘진 않다.

문제는 우선순위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모로코 여성은 약 25%가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으나 처벌이 제대로 이뤄진 사례는 극히 미미하다. 사회가 관습에 얽매여 피해자를 양산하는 마당에 누가 권력을 잡는지가 뭐가 중요할까. 모로코 정부와 국민이 효율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한, 세계 시민은 모두 아미나 필라리다.

정양환 국제부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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