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32>‘변화하는 19세기 집’ 오담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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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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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청 제공
함양군청 제공
오담 정환필(1798∼1859)의 집인 오담고택(梧潭古宅)은 정여창 고택과 마찬가지로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다. 개평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지세가 ‘개(介)’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댓잎 네 개가 어우러졌다는 뜻인데 어떤 잎은 들이 되고, 어떤 잎은 마을이 되고, 어떤 잎은 언덕이 되고, 산이 되었다.

한자가 상형문자이다 보니 복잡한 지형학을 우리는 참 간단하게도 풀어내는구나 싶다. 마을의 모양이 댓잎이라 풍수상으로는 선주형이다. 배 모양이라는 건데 당연히 배에 구멍이 나면 안 된다. 그래서 우물을 함부로 파면 동네가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을 흐르는 옥계천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우물과 그 우물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종바위가 있다. 이 우물은 옥계천 주변 자연암반에서 솟아 나오던 다섯 개의 샘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인공적인 우물을 절대 파지 못하게 했다. 60여 호의 마을에 우물 다섯 개면 충분하다. 더는 욕심을 경계하지 못하면 수질도 나빠지고 물의 양도 줄어든다. 마을의 면적과 거기에서 살 수 있는 적당한 인구, 그리고 그 인구가 마실 수 있는 물의 양까지 정확하게 계산한 도시계획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이 합의를 무시하고 우물을 판 후에는 마을이 급격하게 쇠락했다고 한다. 계획도시일수록 합의를 깨는 일이 잦으면 삶의 질은 자꾸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른 게 아니라 그것이 풍수지리라는 학문이 현대의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다.

개평마을의 집들은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다르다. 하회나 양동이 조선 중기의 사대부가를 보여준다면, 개평마을은 조선 후기 18, 19세기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오담고택은 그 중심에 있다. 사랑채는 1838년, 안채는 1840년에 지었다. 이때 이미 조선의 지식사회는 베이징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물에 충격을 받고 난 후였고, 중상주의가 팽창하고 있었던 격동의 시기였다. 사대부가들도 이 변화에 맞추어 이전의 격을 깨기 시작했다. 오담고택이 잘 보여주듯 툇간(退間)이 자유롭게 쓰이고 부섭지붕이 박공면에 달렸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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