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노 전 대통령의 독설은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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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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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이명박(MB)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명숙, 이해찬, 유시민 씨의 이름을 거론하며 ‘왜 노무현 정부 때와 지금의 말이 다르냐’고 꼬집은 것은 뜻밖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 건설, 원자력 발전과 관련해 한 말이다. MB가 공개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면서 야권 정치인을 비판한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싶다. 비판을 즐겨하지 않는 그의 평소 스타일과도 사뭇 달랐기에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민주통합당 관계자들의 반응이었다. 한명숙 대표는 “우리나라 역사상 대통령이 옛 정권 인사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하고 선전포고하는 일은 없었다”면서 “명백한 선거 개입”이라고 주장했다. 박영선 최고위원은 “탄핵을 받아도 여러 번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바로 지난 정부 때 노무현 대통령이 쏟아낸 발언들이 오롯이 떠올라 쓴웃음이 난다. 민주당 사람들은 정녕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가.

2007년 6월 8일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원광대 특강에서다. 당시 노 대통령은 “오늘 학위수여장을 보니까 ‘명박’(명예박사)이라 써놨던데 이명박 씨가 ‘노명박’만큼만 잘하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야당 대선주자에 대한 노골적인 비아냥이다. 2007년 6월 2일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에서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하니 좀 끔찍하다”면서 “그 당의 후보 공약만 봐도 창조적인 것이 거의 없고 부실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 예비후보의 대운하 공약에 대해 “제 정신 가진 사람이 투자하겠나”라고 했고, 박근혜 예비후보를 가리켜 “해외 신문에 한국의 지도자가 다시 독재자의 딸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2007년 2월 22일 열린우리당 지도부 만찬에서는 “이분들(이명박, 박근혜)이 집권하면 역사의 퇴행이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만약 지금 MB가 이런 투로 야당과 야당 정치인들을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라가 뒤집어지지나 않을까.

노 전 대통령은 비단 야당 정치인만 비난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고건 씨를 참여정부 초대 총리로 기용한 것을 두고 ‘실패한 인사’라고 했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씨를 가리켜 ‘보따리 장수’라고 했다. 정치인 외에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공개적으로 욕보여 자살에 이르게 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더구나 자신의 형 건평 씨를 비호하면서 남 전 사장을 인격 살인했다.

나는 MB를 두둔하거나 새삼 노 전 대통령을 욕보일 생각은 없다. 기왕 MB의 발언이 논란을 촉발했으니 대통령의 비판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대통령도 인격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반박하고 비판할 권리가 있다. 문제는 비판의 내용이다.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법적 신분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정치인으로서 정치활동이 가능하지만 선거 중립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금도(襟度·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다. 금도가 결여된 비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독설(毒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노 전 대통령 발언은 비판이 아니라 독설이라고 본다. 그에 비하면 몇몇 인사의 과거 발언을 단순히 나열했을 뿐인 MB의 기자회견은 솔직히 ‘비판’ 축에도 끼기 어려운 미지근한 소리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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