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송우혜]세상의 삶을 향상시키는 위인들의 자취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췌장암으로 별세한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열기가 세계적으로 뜨겁다. 서로 갈라져서 대립하는 분열된 세계가 그를 애도하는 일에서 모처럼 일치된 현상을 보였다. 그는 위인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존재인지를 삶만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내었다.

잡스의 죽음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역사에서 그 죽음을 온 국민이 슬퍼한 사례가 떠올랐다. 조선시대의 예를 보면 무신(武臣)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가장 큰 애도를 받았다. 문신(文臣) 중에서는 율곡 이이의 경우가 그에 필적한다.

두 분 모두 선조 때의 인물로서 국가적 전쟁의 와중에서 별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남쪽의 일본이 일으킨 전쟁인 임진왜란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전사했고, 생전의 업적은 물론이고 죽음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전사 사실을 안 백성들이 자기 부모가 별세한 듯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율곡은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온 전쟁인 니탕개란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병사했다. 그러나 율곡의 경우 그의 학문과 행적에 비해 죽음에 대해서는 후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율곡은 매우 뛰어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두뇌와 문장으로 과거마다 석권하여 아홉 번 장원의 영예를 안았다. 벼슬길에 오른 뒤 투철한 안목과 철저한 현실감각, 뛰어난 행정력으로 능하게 국정을 다루었다.

온 백성 슬퍼한 이순신의 죽음

선조 15년(1582년) 12월에 병조판서로 임명받은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있다가 선조 16년 1월 하순 니탕개란이 발발하자 그대로 취임하여 전쟁 진압을 총지휘했다. 병조는 본래 사무가 번잡한 부서라서 평소 아무리 재능 있고 민첩하여 일처리가 능한 이라도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러나 율곡은 수십 년 만의 외침(外侵)으로 전쟁이 일어난 비상시기라 처리할 사무가 엄청났던 때임에도 물 흐르듯 능란하게 사무를 처결했다. 그래서 병조의 오래된 노련한 관리들이 모두 입을 모아 “판서로서 이처럼 재능이 있고 처결능력이 있는 분은 본 적이 없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시한 전시비상대책인 ‘공안(貢案)을 고치고, 액외병(정원 외 병사)을 두고, 곡식을 바친 자에게 관작을 제수하고, 참전한 자에게 서얼 허통의 특전을 주는’ 등의 여러 개혁정책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거센 탄핵과 비난을 당한 끝에 그해 6월에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석 달 뒤에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10월 말에 상경하여 취임했으나 두 달여 만인 선조 17년 1월 16일 향년 48세의 한창 나이에 병사했다. 전시의 격무와 잔혹한 탄핵으로 인한 막중한 스트레스가 그의 수명을 줄인 것이다. 그의 죽음은 온 나라에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그를 격렬하게 탄핵하고 비난했던 반대자들의 지도자였던 우성전(禹性傳)이 쓴 ‘계갑일록’에는 당시의 모습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상(上·임금)이 부고를 듣고 애통하여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궁벽한 촌민들도 모두 머리를 모아서 곡하고 슬피 울부짖으며 서로 조상(弔喪)했다. 태학생(太學生), 금군(禁軍), 시민, 하급관리, 각 관청의 아전들이 모두 와서 울며 제전(祭奠)을 드렸다. 발인하는 날 횃불을 들고 영구를 보내는 사람이 수십 리에 뻗쳐서 거리를 메웠고, 동리마다 슬피 우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이 성균관으로부터 향과 제찬(祭粲)을 메고 백색 단령을 입고 좌우로 줄을 나누어 걸어가며 길 가는 사람을 벽제((벽,피)除)하니 상소할 때와 같았다.”

율곡 발인 때 수십리 횃불 든 인파

강력한 탄핵과 비난이 닥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감연히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던 율곡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기리고 그로 인한 이른 죽음을 온 백성이 슬퍼한 것이다. 니탕개란이 일어난 지 9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니탕개란 때 경험했던 율곡의 개혁정책들은 임진왜란에 대처하는 기본정책들이 되어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로 보아 율곡이 별세했을 때 그처럼 슬퍼했던 민중의 역사 보는 눈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생애를 높이 기리고 그 죽음을 크게 슬퍼할 위인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고 매우 호사스러운 행운이다. 그런 위인들로 인하여 역사가 발전하고 민중의 생활이 향상된다. 그런 위인이 많은 나라와 사회는 사람이 더욱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만한 곳이 된다.

우리 사회가 그런 위인들을 어떻게 찾아내고 길러내며, 어떻게 그들의 위인 됨이 제대로 발현되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다.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swhoo@hanmai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