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미경]미국사회가 보여준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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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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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고별 세일’ ‘80% 파격 인하’ ‘부도 총정리’….

2주 전 서점 ‘보더스’에 갔을 때 한국 땡처리 행사장에서 많이 본 듯한 이런 문구들이 적힌 딱지가 입구에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서점 체인이지만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난 보더스의 마지막 영업날이었다.

넓은 매장에는 아이들이 뛰놀며 책을 보던 키즈북 코너도,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던 카페도 모두 사라지고 한편에서 남은 책을 모아놓고 팔고 있었다. 책 5권을 10달러(약 1만2000원)에 사서 서점을 나서면서 ‘싸게 건졌다’는 즐거움보다 씁쓸함이 앞섰다. 보더스 같은 대형 서점이 이렇게 무너지는 상황에서 소규모 서점은 얼마나 심각한 존폐 위기에 몰려 있을지 짐작이 갔다.

서점의 위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독서인구의 감소다. 미국에서도 독서율 하락은 큰 고민인 듯하다. TV에는 유명 스타들이 등장해 독서를 장려하는 공익광고가 방송되고 대통령도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 당부를 빼놓지 않는다.

이곳에서 느낀 것은 ‘읽는 즐거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도서관을 갖추고 세계적인 작가들을 다수 배출한 나라답게 시민과 정부가 나서서 독서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2주에 한 번씩 ‘북스와프’ 행사가 열린다. 입주자들이 자신이 읽은 책을 한 권씩 가지고 와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바꿔 보는 행사다. 대부분 가벼운 소설책이지만 책을 추천하는 이유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책의 메시지가 정리되고 다음에는 더 좋은 책을 가지고 나와야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미 의회방송 CSPAN2는 의회가 열리지 않는 주말 48시간 동안 ‘북TV’라는 책 전문 채널로 바뀐다. 일요일 정오에 방송되는 ‘심층(In-Depth)’이라는 프로그램은 북TV의 자존심으로 통한다. 무려 세 시간 동안 한 작가와 인터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정말 지루한 프로그램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작가의 작품세계를 완벽하게 커버한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24, 25일 워싱턴에서는 ‘전미 도서 축제(National Book Festival)’가 열리고 있다. 의회도서관 주최로 열리는 행사로 사서 출신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부인 로라 여사의 제안으로 시작돼 올해로 11회째를 맞고 있다.

이 축제는 성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책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첫째 날 가보니 유명 여배우 줄리앤 무어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화책 ‘딸기 주근깨 얼굴(Freckleface Strawberry)’을 낭송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은 동화 ‘아빠는 너희들을 응원한단다(Of Thee I Sing)’의 일러스트레이터 로렌 롱이 삽화 그리는 법을 강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타고 책에 대한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도 인기가 많았다.

전미 도서 축제는 자금난을 겪다가 지난해 자선사업가인 칼라일 금융그룹의 설립자 데이비드 루빈스타인이 1년에 100만 달러씩 써 달라며 500만 달러를 내놓으며 성대하게 부활했다.

루빈스타인 회장은 기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주말이면 친구들은 파티에 달려갔지만 가난했던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대출 한도인 12권의 책을 빌리면서 빨리 다음 주말이 돼서 다른 책들을 빌렸으면 했다. 책을 통해 무언가 깨달아가는 즐거움은 나중에 내가 이룬 그 어떤 물질적 성공보다 소중했다.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하지만 나 같은 아이들이 지금도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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