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각론 파고드는 中, 개론 훑는 韓

  • Array
  • 입력 2011년 10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조선족 청년 한영호 씨를 만날 때면 늘 적잖게 긴장한다. 고구려 역사 때문이다.

언젠가 그는 고구려와 한민족의 동질성을 부정하며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의 이름이 현재의 한반도 사람과 왜 다르냐. 민족이 같다면 이름에서 비슷한 면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라고 하는데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도 말했다. 한 씨는 언어와 관련해서도 “고구려 사람들의 말이 신라, 백제와 같았느냐. 증거가 있느냐”고 질문했다.

한 씨는 열 살 때 고향 옌볜(延邊)을 떠나 베이징(北京)에 온 이후 줄곧 중국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중학교 국사시간에 배웠단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연원과 중국이 주장하는 영토주의 사관의 맹점 등을 거창하게 설명하려 했던 기자는 질문의 구체성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흔히 중국을 가리켜 ‘대충대충 습성’이 몸에 배 있다고들 한다. 큰 것을 좋아하는 ‘대물(大物) 지향형’이다 보니 구체성에 약하다는 것이다. 중국이 아직 반도체에서 한국에 뒤져 있는 것도, ‘소녀시대’를 본뜬 중국 걸그룹 ‘아이돌 걸스’가 짝퉁이라는 혹평에 시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믿고 싶은 또 하나의 우상인 듯하다. 한 씨가 고구려사에서 각론을 물고 늘어지듯 중국은 적어도 외교에서는 한발 한발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인 런민(人民)일보의 인터넷판인 런민망은 최근 한국어판 사이트를 개설했다. 연말에는 한국지사도 열 계획이다. 사이트를 총괄하는 저우위보(周玉波) 씨를 만나 “한국 독자들이 과연 중국의 관변뉴스를 읽겠느냐. 공급자 시각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기자는 런민일보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우 씨는 자신 있다는 듯 “한국에서는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기사가 된다’고들 하죠?”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개가 사람을…’은 한국 기자들이 기사가치를 따질 때 쓰는 일종의 ‘직업어’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이제야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를 시범 개설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한국 뉴스 시장의 속성까지 주도면밀하게 분석해 놓고 있었다.

베이징 시는 최근 시정에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 교류는 가급적 줄이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외국 인사들을 초대해 놓고 사진 찍고 폼이나 잡는 행사는 하지 않겠다는 것. 일견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중국문화가 체면을 중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와는 확 달라진 분위기다.

중국이 각론을 논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을까.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선 “중국에 한국 기업들의 이미지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질문이 나오면 “이런저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자판기식 답변이 뒤를 이었다. 일부 의원은 중국 정부의 금융긴축 정책과 관련한 질문을 하려는 듯했으나 도대체 그 내용이 뭔지조차 숙지하지 못한 듯했다.

한 의원은 질문 마지막에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열강에 싸여 살고 있다”며 현 정세의 위중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거시담론 자체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나오는 게 아닐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다.

내년이면 한중 수교 20주년이다. 이제 중국은 각론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론만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3억 인구의 대국을 상대하려면 좀 더 집요하고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사외(社外) 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