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이종훈]지도자의 첫 번째 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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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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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파리 특파원
이종훈 파리 특파원
파리 특파원은 인근 유럽 국가로 출장을 자주 간다. 그런데 유독 런던에 갈 때면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헤맬 때마다 먼저 다가와 “어디를 찾느냐”고 묻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시민을 만난다. 이번 취재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문화 및 소외 계층 갈등, 저성장과 빈부 차 확대, 소통의 단절 등 다양한 영국 사회의 병리를 드러낸 25년 만의 최악의 폭동은 다행히 지난 주말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치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위기는 지금부터다. 캐머런의 위기는 2011년 유럽 보수주의의 위기를 상징한다. 복지 혜택 및 일자리 축소, 청년 실업 증가를 무릅쓴 캐머런의 긴축정책은 이번 폭동의 한 원인이었다. 물론 긴축정책을 부른 비대한 공공 부문과 엄청난 재정적자까지 그의 책임은 아니다. 죄를 묻는다면 오히려 노동당 정권의 책임이 더 크다. 여하튼 캐머런은 경제 성장의 욕심을 버리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면서까지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포퓰리즘보다 국가를 우선한 책임 있는 보수의 결단이었다. 작금의 유로존 부채 위기와 글로벌 금융혼란을 볼 때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이번 폭동으로 그의 용감한 결심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대의는 큰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피해를 넘어 보수 진영의 분열까지 부르고 있다. 캐머런은 여당 동료인 런던 시장까지 가세한 야당의 경찰 예산 축소 철회 요구를 일축했지만 앞으로도 공공, 복지 부문에서 긴축 일변도의 정책 기조를 재검토하라는 요구는 끊임없이 쏟아질 게 뻔하다. 임기가 많이 남았지만 정치인인 그가 끝까지 소신을 지킬 수 있을까.

역시 보수주의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갈등을 부르는 법과 정책으로 시험대에 올라 있긴 마찬가지다. 사르코지는 당장 8개월 뒤, 메르켈은 내후년에 각각 재선과 3선에 도전한다. 사르코지는 지난해 가을 엄청난 반발을 부른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연금을 계속 퍼주기 식으로 운영하면 후손에게 거덜 난 나라를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소신 하나로 밀어붙였다. 또 불법 이민자 추방과 이민 조건 강화, 공공 장소에서 이슬람 여성의 베일 금지 같은 다문화 역행 정책도 쏟아내고 있다.

메르켈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자 2022년까지 독일의 원전을 모두 폐기하겠다는 놀라운 결정을 했다. 그는 뛰어난 물리학자로 핵 원자력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 잘 아는 지도자다. 하지만 국민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로 과감히 소신을 버렸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어찌 보면 미래를 내다본 혜안일지 모른다.

동물적 본능과 강한 자생력으로 비주류의 설움을 씻고 1인자에 오른 승부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르코지와 메르켈은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금융위기의 폭풍에 맞서고 있다. 둘은 유럽통합의 역사적 성과물인 유로존을 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해가며 해법을 찾고 있다.

유럽은 지금 중동·아프리카의 민주화 봉기, 유럽 부채 위기와 유로존 흥망, 리비아 내전, 다문화 갈등에 따른 테러와 폭동 등 역사에 큰 획을 그을 격변기를 지나고 있다. 그리고 유럽을 견인하는 3인의 보수 지도자는 매우 중요하고 논쟁적인 결정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향후 수십 년간 유럽 보수주의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을 키가 이 3명의 손에 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리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8명의 대통령과 일하고 지난달 찬사 속에 퇴임한 명장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은 위대한 지도자의 첫 번째 자질에 대해 “매일 벌어지는 오늘의 일과 문제들을 뛰어넘어 내일 이후를 바라보며 가능성과 잠재력을 분별해내는 비전”이라고 말했다.

이종훈 파리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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