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봉준호]영화 세트장은 ‘문화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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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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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영화감독
봉준호 영화감독
요즘 ‘설국열차’라는 SF영화를 한창 준비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설원 위를 달리는 미래의 기차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격렬한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에는 제법 큰 규모의 특수한 기차세트가 꼭 필요하다.

요즘 나와 제작사, 스태프의 가장 큰 고민은 이 대형 기차세트를 ‘어디에 짓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이즈의 국내 스튜디오에는 들어갈 수 없는 상당한 크기의 세트라서 어쩔 수 없이 해외에 있는 대형 세트장들을 조사하고 있다. 현재 후보로 압축된 곳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대형 스튜디오들이다.

문득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얘기한 헝가리와 체코 같은 나라들은 영화산업 규모가 우리보다 딱히 크지도 않고, 매년 만들어내는 자국 영화의 편수도 우리보다 훨씬 적은 나라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아래 수준급의 대형 영화 스튜디오들을 보라는 듯 운영하면서 많은 해외 영화들의 촬영까지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급 영화인 ‘헬보이 2’라든가 최근 촬영을 마친 ‘미션 임파서블 4’ 같은 영화들이 모두 최근에 헝가리나 체코의 세트장을 거쳐 간 영화들이다.

물론 이런 대형 세트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무슨 국가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펠리니 영화의 고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우파 UFA 스튜디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명감독들이 찾고 있는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 등등.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영화 스튜디오들은 그 자체로 한 나라의 영화적, 문화적 수준을 웅변하는 상징적인 아이콘과도 같다.

한국 영화산업은 한국 나름의 오랜 역사와 규모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10여 년에 걸쳐 국제적인 인지도 또한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그런 위력적인 영화산업의 나라에 국제적 규모의 대형 스튜디오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무척 이상한 일이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멋진 스튜디오가 있어서 집에서 편안히 출퇴근을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초대한 배우들과 ‘설국열차’를 촬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해본다.

이것이 당장 현실이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가까운 미래에 외국의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이 즐거운 발걸음으로 우리의 스튜디오를 드나들며 영화적 상상력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풍경이자 문화가 될 것이다.

봉준호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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