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용휘]영도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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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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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휘 사회부 차장
조용휘 사회부 차장
‘이 땅에 근대식 조선소가 처음으로 들어앉은 시기는 조선조 말엽 고종 24년(서기 1887년)이고 그 자리는 부산 영도섬의 해변이 매립되기 전의 남항동 2가인 이 지점이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한국 근대조선공업이 발상한 이 자리에 이 빗돌을 세운다.’

부산 영도구 남항동2가 대평초등학교 교정에 세워놓은 ‘한국 근대 조선 발상 유적지’ 비문이다. 그로부터 124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조선공업의 모태인 영도는 ‘절망’으로 가득하다. 그 중심에는 광복 이후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대한조선공사의 후신(後身)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의 본질은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분쟁이다. 그러나 분쟁 당사자가 아닌 정치세력이 생산해 내는 일방적 주장과 무책임이 영도를 지배하고 있다. 세력들의 의도대로 ‘촛불’ 대신 ‘희망버스’가 영도에 등장했지만 지역 여론은 차갑다.

이번 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타워크레인에서 2일로 209일째 고공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치·노동권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한 ‘희망버스’는 멈출 줄을 모르고 달리고 있다. 영도구민들의 삶이야 어떻게 되든 한진중공업 사태는 진보진영의 ‘해방구’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사태의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도조선소는 26만4000m²(약 8만 평) 땅에 독(dock) 4개밖에 갖추지 않은 데다 독 길이도 300m 내외여서 대형 컨테이너선을 수주해도 배를 만들 수 없는 구조다. 회사는 필리핀 수비크에 새 조선소 건설을 추진했다. 수비크조선소는 영도조선소의 9배 규모다. 영도조선소는 일감이 없어 독이 텅 빈 날이 늘었다. 올 6월 선박 6척을 수주한 것을 빼면 지난 3년간 영도조선소의 수주실적은 ‘제로’였다. 경영실적도 나빠졌다.

그러자 노조는 “사측이 수비크조선소로 물량을 빼돌렸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 “신규 수주에 적극 나서지 않은 대신 인력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를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충돌은 지난해 12월 사측이 영도조선소 전체 노조원 1200여 명 중 400명에 대한 구조조정 방침을 밝히자 노조가 같은 달 20일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김진숙 위원의 크레인 농성, 사측의 직장폐쇄, 1차 희망버스 행사로 이어지면서 사태는 본질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총파업 6개월여 만인 6월 27일 노사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문제는 민주노총이 개입하면서부터 복잡해졌다. 지난달 9, 10일 2차 희망버스는 영도 청학동, 봉래동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30, 31일 3차 ‘희망버스’는 큰 충돌 없이 끝났지만 구조조정, 비정규직, 반값등록금 등 본질과 관계없는 진보진영 이슈들이 영도를 뒤덮었다.

희망버스에서 ‘절망’을 느낀 영도주민들은 “노사가 합의를 했다고 하는데 왜 엉뚱한 사람들이 몰려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사주(조남호 회장)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는 불만도 폭발하고 있다.

부산은 1924년 3월 부두하역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총파업을 벌인 곳이다.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는 거시적 노동운동의 틀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1970년대 초 영도의 대동조선이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노조가 회사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가진 노동운동의 일번지답게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사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 정치세력은 영도를 떠날 때가 됐다.

―부산에서

조용휘 사회부 차장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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