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병일]FTA오역으로 국내기업 피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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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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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FTA교수연구회 회장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FTA교수연구회 회장
2월 중순 유럽연합(EU) 의회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을 승인했을 때 한국 국회에서의 비준동의안 처리도 순항하리라는 예상은 ‘번역 오류’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빗나갔다. 통상교섭본부가 밝힌 오역은 207건. 그 내용을 보면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 발생했다는 말을 수긍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오류도 수두룩하다. 그동안 협상의 파고를 잘 헤쳐온 통상교섭본부였기에 이번 오역사태에 대한 실망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실수도 모자라 세 번이나

초기 대응부터 틀렸다. 번역 오류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정부는 이미 제출된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고 제대로 된 비준동의안을 다시 제출하는 것을 머뭇거리다가 여론의 질타를 맞고서야 입장을 바꿨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안을 재상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관행이란 이유로 피해 가려 했다. 시대가 바뀌면 관행도 바뀐다. 재상정하기로 결정한 후 다시 제출된 비준동의안조차 오역투성이라는 것에 화가 치민다. 한 번의 실수로 끝내야 할 것을 세 번이나 국무회의에서 의결, 재의결하는 대목에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통상교섭본부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시간에 쫓기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어제오늘의 핑계가 아니다. 통상업무를 전문화한다는 이유로 정부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통상교섭 기능을 일원화하여 1998년 출범한 것이 통상교섭본부다. 출범 10년이 넘었고 그간 제출된 FTA 비준동의안이 한두 건이 아닌데, 협상에만 치중하고 정작 협상의 결과물인 협정문에는 소홀하단 말인가. FTA 협상한다고 채용했던 그 많은 인력은 어디에 있고, 팽창된 조직 가운데 협정문 번역 하나 제대로 책임지는 곳이 없단 말인가. 시간과 인력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업무 분장의 적절성과 적재적소의 인력 배치다. 통상교섭본부에 120명, 국제법률국에 30여 명의 전문인력이 있는데도 민간 변호사 한 명이 지적한 번역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이미 타결된 협상을 국회가 비준 동의해 줄 것이라는 무사안일한 인식과 이에서 비롯되는 무성의가 이번 오역사태의 본질이다. 번역 오류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때마다 통상교섭본부는 어차피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통상법상 ‘영어’라며 한글본은 방대하고 인력이 부족해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식의 해명을 해왔다. 그렇다면 한글본은 대충 번역했다는 이야기인가. 한글본과 영문본은 동등한 효력을 지니고, 이들 사이에 불일치가 있는 경우 협상 때 사용한 언어가 효력을 갖는다. 그 불일치가 잘못된 번역 때문이라면 나라 망신 아닌가. 만약 FTA를 활용하는 국내 기업이 잘못된 국문본에 의지하다가 손해를 본다면 그 피해를 누가 보상할 것인가. EU 측과 합의한 7월 발효시한 때문에 시간에 쫓겼다는 변명은 통상 공무원들의 자존심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이며, 누구를 위해 협정문이 존재하는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통상교섭본부 신뢰위기 자초해

FTA 비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회가 반대집단을 설득하고 피해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간에 영어사전 들여다보며 번역 흠잡기로 시간을 보낸다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온다. 오랜 기간 치밀하고 꼼꼼하게 준비해온 EU와의 FTA가 번역 논란 때문에 허겁지겁 종지부를 찍는 인상을 남기게 된 통상교섭본부는 신뢰 위기를 자초했다. 졸속 오역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을 위한다며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는 정부라면 졸속 오역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는 기업들이 FTA를 외면할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야 했다. 이번 사태가 실무자 몇 명 문책하고 검독시스템 보완한다는 명분 아래 인력 충원으로만 끝나지 않길 바란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FTA교수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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