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태훈]슬픈 열도에서의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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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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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23일 일본 도쿄 인근 요코하마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요즘 동일본 대지진 때문에 어수선합니다. 주위에선 비상사태에 대비해 식료품 사재기를 하고 있어요. 저도 슈퍼마켓에서 휴지를 몇 개 더 샀죠. 그런데 대학생 아들로부터 ‘왜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잔소리를 들었어요. 다시 반납했지만 어찌나 부끄럽던지….”

대지진에 지진해일(쓰나미)까지 덮친 센다이 지역 근황도 들었다. 미야기 현립 어린이병원의 최정호 부장(심장혈관외과)은 “22일까지도 휘발유가 없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다. 지진으로 다친 어린이 2명의 수술을 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일본 열도는 11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 후쿠시마는 암흑천지가 됐고 센다이 항에는 제멋대로 휘어진 전봇대와 승용차가 뒤엉켜 있다. 2주일 전만 해도 정갈했던 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지진 직후 일본 출장 지시를 받았다. 직업적인 사명감과 더 큰 지진이 오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밀려왔다. 제휴사인 아사히신문의 지원을 받아 도쿄에서 후쿠시마∼센다이∼이와테로 이동하는 과정은 고단했다.

첫날 도착한 후쿠시마는 인적이 드물었다. 숙박할 곳을 찾기 어려웠다. 편의점은 텅 비었다. 찬 주먹밥으로 요기를 했다. 이재민 300명이 몰려 있는 후쿠시마 시청에서 노숙을 했다. 찬기가 등에서 배까지 전해졌다. 배고픔과 추위는 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13일 센다이의 호텔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먹을 물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진으로 흔들렸다. 이튿날 센다이 항에서 쓰나미 경보가 났을 땐 폐건물 옥상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피부로 느낀 공포였다.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자원봉사자 취재를 할 때였다. 15일 센다이의 한 파이가게에선 무료로 음식을 나눠줬다. 삶은 계란과 어묵, 국물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허겁지겁 계란을 두 개째 입에 넣고 있을 때 탁자 위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사람을 위해 한 개씩만 먹읍시다.’ 낯이 붉어졌다.

미야기 현 미나미자이모쿠 정 상인들이 소학교에서 지역 주민을 위해 무료 배급을 할 때도 그랬다. 자원봉사자들은 “먹을 게 있는 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줄에서 나와 달라”고 요청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기자에게도 된장국과 바나나를 건넸지만 이를 사양하지 못했다. 국 한 그릇으로 3인 가족이 나눠 먹는다는 한 노파의 얘기를 들으며 머쓱해졌다.

혼란 속에서도 지진 피해 현장의 이재민들은 침착했다. 연락이 닿지 않는 가족을 찾아 헤매면서도 슬픔은 가슴속에 감췄다. 복구 작업은 더뎠다. 구조대는 길이 끊기고 진흙으로 뒤덮인 재해 지역을 꼼꼼히 수색했다. 혹시 생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때문에 배급이 늦어져도 불평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한 선배는 “한국이었다면 공병대를 투입해 길을 뚫고 헬기로 식량을 배급할 텐데 일본은 이상하다”고 말했다. 다른 선배는 “일본인의 유전자는 한국과 다른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도 원리 원칙을 지키는 게 대단하다”고 했다.

대지진 현장 취재는 18일 중단됐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성 물질이 계속 누출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와테에서 지진 피해가 없는 서쪽 니가타로 향했다. 니가타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도 일본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들을 보며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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