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형삼]박신양과 고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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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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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배우 박신양은 현재 출연 중인 법의학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100구가 넘는 시체 부검을 참관하고 전국의 법의학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부검 현장을 지켜본 뒤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처럼 철저하게 배역을 공부하는 것은 “내 양심”이며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평생 이 일을 하는지를 모르면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없다”고도 했다. 프로답다.

그런데 배우 고현정의 연기 철학을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연기하는 건 나태한 거예요. 그건 평상시 몸과 마음을 닫아놓는 거예요. 배우는 척추를 다 확장시켜 상상력으로라도 우주와 대화하고, 역할을 맡으면 남김없이 그 사람으로 훅훅 왔다갔다하거든요. 그러려면 선입관이 전혀 없이 열린 상태, 늘 말랑말랑한 상태라야 해요. 좋은 배우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없어야 해요.”(신동아 2월호)

고현정은 1990년, 박신양은 1996년에 데뷔했다. 6년 더 먹은 ‘짬밥’이 고현정을 ‘우주와 대화’하고 이 사람 저 사람 ‘훅훅 왔다갔다’하는 경지로 끌어올렸을까. 꼭 그런 것 같진 않다. 더욱이 고현정에겐 결혼 후 10년의 공백기가 있었다. 연기경력에 더해 재벌가의 며느리, 최고경영자의 아내, 아이 키우는 엄마, 그리고 이혼녀로서 온몸으로 겪어낸 여러 ‘실전 배역’이 상상력 이해력 유연성을 키워주지 않았을까.

20년 넘게 잡지를 만들어온 필자에게 늘 절실한 것도 상상력이다. 정치에서 스포츠, 수필에서 기행문에 이르는 갖가지 내용과 형식의 기사를 한 권의 책에 담아 독자의 호응을 끌어내려면 그들의 복잡다단한 요구를 짚어내 가려운 곳을 제때 긁어줘야 한다. 하지만 비슷한 정서를 지니고 비슷한 여건에서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기자들이 각양각색 독자들의 속내를 두루 꿰뚫어보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한다. 동아일보 출판국은 신동아 주간동아 여성동아 같은 전통 있는 잡지를 펴내는 본업 외에도 최근엔 자회사 등과 연계해 정부 및 정부산하기관, 지자체, 기업 등의 홍보·소식지 제작에도 직간접으로 참여한다. 이런 다품종 생산을 통해 그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독자와 취재원, 이슈와 콘텐츠를 체험하고 축적하는, 그래서 ‘종합적인 상상력’을 배양하는 소중한 기회를 갖고 있다. 잡지기자 훈련을 제대로 받은 전문인력이 이렇게 확보한 풍부한 데이터를 활용해 제작하기에 외주를 맡긴 발행주체도 흡족해한다.

1923년 앨프리드 슬론이 GM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GM은 포드에 크게 뒤져 있었다. 슬론은 단일 모델의 대량생산에 치중한 포드와 달리, 소득과 인구구조에 맞춰 차종과 사업부를 캐딜락-뷰익-폰티액-올즈모빌-쉐보레로 다양화했다. 각 사업부는 디자인도 독자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3P 만족’. GM에선 누구(Person)든, 무슨 목적(Purpose)에서든, 주머니 사정(Purse)이 어떻든 원하는 차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GM은 1927년 포드를 추월했고 이후 한 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환, 제도공, 세일즈맨, 부품회사 사장 등을 두루 체험한 슬론의 상상력과 통찰력이 녹아든 덕분 아닐까. 마침 2월 17일 오늘은 그의 45주기다.

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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