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윤택]나는 시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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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영산대 연기뮤지컬학과 교수
이윤택 영산대 연기뮤지컬학과 교수
1970년대 말 ‘현대시학’ 잡지사는 서울 충정로2가 언덕배기 골목길에 있었습니다. 눈이 내린 언덕길을 미끄러지며 올라가면 간판도 없는 낡은 건물 한 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건물 2층 2평 반 남짓한 사무실에 노시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현대시학을 창간하시고, 혼자 편집 교정 원고 청탁을 다 하시던 전봉건 시인이십니다. 제가 처음 현대시학을 방문한 때는 1978년 초겨울이었습니다. 노시인은 제가 내민 시 3편을 보시고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시면서 2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무료하여 책상 위에 쌓인 원고들을 훔쳐보았습니다. 강원도에서 보내온 젊은이의 편지와 시 원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젊은 친구가 다음호에 새로운 시인으로 등장한 최승호 형이었습니다. 저는 더는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제야 “그래, 가서 추천완료 소감 원고지 3장 분량으로 써서 보내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시골 청년문사는 그렇게 일면식도 없던 노시인의 추천을 받아 시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배출한 ‘현대시학’의 시인들은 놀랍게도 전국 각지에서 단단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정진규 시인이 주재하시는 현대시학은 인사동 밥집 골목길에 있었지요. 잡지는 더욱 두꺼워지고, 내용도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나 편집실은 흡사 작은 구멍가게 같아서 잠시라도 앉아 있기 민망할 정도였지요. 독립운동가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풍채를 지닌 정진규 선생이 그 비좁은 곳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부조리한 상황희극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현대시학은 그런 부조리한 모습으로 버티면서 지령 500호를 맞았습니다. 작고 남루한 2평 반 지상에서 발신하는 시의 광채!

그런데 왜들 시의 위기를 운운하는 것이지요. 시인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시의 홍수가 날 지경인데 왜 시의 죽음을 논하는 거지요. 시인들이 너무 많아서 정작 시의 귀중함을 잃어버렸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문학 귀족주의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인들은 많을수록 좋고 시가 흘러넘칠수록 세상은 더욱 광채를 띠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한때 치열했던 시인들의 삶의 태도가 시들해졌기 때문 아닐까요? 천박한 삶 속에 놓여 있을수록 시인의 존엄성은 반동적으로 강화됩니다. 좁고 낡은 방에서 발신하던 시의 광채야말로 그런 ‘현대시학’의 반물신주의적 저항력을 증명했습니다.

수년 전 젊은 시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 출연했다가 느닷없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왜 시를 쓰지 않습니까?” 저는 그만 말문을 잃었습니다. 생방송이라기에 궁색하게 내뱉은 대답이 “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이 세상의 부질없는 일거리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살다 보면 시는 멀어집니다. 시인이 외롭게 자신과 마주앉아 ‘나 속의 나 자신’과 정면승부를 겨룰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리면서 시는 시들해지고, 결국 시인은 시시한 인간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비록 비좁고 남루한 삶의 공간에 존재하더라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는 광인이 시인의 참모습일 것입니다. 스스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외로움을 무기로 삼고, 예민한 신경세포와 날카로운 이빨로 견고한 세상을 물어뜯을 수 있는 저항력이 시의 힘입니다. ‘현대시학’ 지령 500호를 맞아 시인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여전히 시인인가? 아니면, 시시한 인간에 불과해졌는가?”

이윤택 영산대 연기뮤지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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