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위키리크스와 아레오파지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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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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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진실의 파괴성’을 느끼는 건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침실에서 부부가 은밀히 나눈 대화가 인터넷에 뜬다면? 어젯밤에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직장 상사를 흉본 것이 공개된다면? 생각만 해도 불쾌한 일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떤 ‘진실’들은 알 필요가 없거나 모르고 넘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나 욕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건 사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라 간 외교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국 지도자에 대해 ‘무능하다’는 첩보를 주고받으면서 겉으로는 최고의 예우를 하거나, 사실은 별 내용도 없으면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치켜세우는 일은 국익을 위해 필요할 때가 있다.

최근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국의 외교 전문(電文)을 공개해 연일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내부에서만 오고가던 첩보가 외부에 드러남으로써 미국 정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이 문서들에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괴물 같은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에게 순종적이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무능하고 광란의 파티를 즐긴다’처럼 소소한 내용도 많지만 국익에 민감한 내용도 많다. 한국과 관련된 내용만 보더라도 ‘북한의 고위 외교관 다수가 망명했다’든지 ‘중국이 한국을 뺀 양자 또는 3자회담을 미국에 제안했다’ 같은 안보·외교상 중요한 정보들이 포함됐다.

미국 정부는 이번 폭로가 국제관계를 위기에 빠뜨리는 반국가 행위라며 정면 대응하겠다고 밝혔고, 유럽도 위키리크스의 창업자 줄리안 어산지를 체포하는 데 나섰다.

하지만 여론은 복잡하다.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는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겉 다르고 속 다른 미국 외교의 ‘가면’이 벗겨진 걸 은근히 즐기는 사람도 있다.

위키리크스 측의 영리한 마케팅도 복잡한 반응에 한몫을 했다. 이들은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가디언, 독일 슈피겔 등 세계 각국의 유명 권위지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폭로를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로 포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기밀문서 공개가 ‘중대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미국 외교의 목표들과 성공, 타협과 좌절을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잘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러니 내로라하는 강대국 정부들이 어산지를 체포할 명목이 없어 ‘성폭력 혐의’ 운운하는 것이 군색하기만 하다.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으로 성장, 해킹은 하되 컴퓨터를 파괴하지 않고 정보만 공유하는 ‘해킹계의 로빈 후드’, 미군 아파치 헬기가 이라크에서 민간인을 사살하는 영상 공개, 2009년 국제 앰네스티 미디어상 수상 등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호주 출신인 어산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폭로사이트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미국식 시장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절대적으로 자유시장을 지지한다’고 했다. 하기야 자유언론의 아버지 존 밀턴은 자유주의의 고전인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사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장을 주장하며 자유시장에서는 자율적인 조정에 의해 진리가 이긴다고 했다.

어산지는 정보와 사상의 자유시장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숨바꼭질이 이어지는 한 언제 어디서든 ‘불편한 진실’과 마주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신연수 산업부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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