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성하]개미와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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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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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지하도 계단이 에베레스트 봉보다 더 오르기 힘들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스키부상으로 무릎인대가 늘어나 석고붕대를 해야 했던 3개월 반이었다. 에베레스트 봉이 높고 험하다고는 하나 못 오를 것도 없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문제는 높이가 아니라 의지니까. 하지만 계단은 달랐다.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장애물이었다. 그때 비로소 장애인의 설움을 느꼈다. 설움이란 다른 게 아니다. 누군가가 내 입장이 되어 준다면 아주 쉽게 해결해 줄 수 있는데… 하는 데서 비롯되는 야속함이다.

이게 벌써 11년 전 일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떨까. 그 광화문 계단에는 에스컬레이터가 놓였다. 다시 석고붕대를 무릎에 대더라도 이젠 오르내리는 데 불편이 없다. 휠체어 장애인은 어떨까. 세종로 사거리의 동서남북에 횡단보도가 생겨 역시 아무 문제없다. 에스컬레이터며 횡단보도라는 게 비장애인에게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설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다르다. 불가능과 가능의 접경을 넘나드는 ‘엄청난’ 시설이다. 그런 변화, 과연 어디서 올까.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쏟아지는 소나기의 빗방울을 개미 입장에서 바라보는….

장애인스키의 메카가 된 ㈜강원랜드의 하이원 스키장이 좋은 예다. 10여 년 전 김광식 당시 강원랜드 사장으로부터 스키장 건설 계획을 듣고는 주저 없이 설계 최우위 가치에 ‘장애인’을 두라고 조언했다. ‘장애인이 불편 없이 스키를 탈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스키장이 아니겠는가’라는 평소 생각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스키장은 그렇게 설계됐고 하이원은 개장 즉시 최고 스키장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변화는 게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 최초로 장애인스키학교가 하이원에 세워졌고 매년 겨울 많은 장애인이 스키캠프에 참가해 설산에 올라 자연을 호흡하고 스키를 배운다. 모기업 ㈜강원랜드도 장애인스키 팀을 창단하고 대한장애인스키협회(회장 최영 강원랜드 사장)를 맡아 장애인스키 발전에 대들보가 돼 주었다. 장애인 세계스키선수권대회도, 매년 열리는 장애인월드컵스키대회도 모두 하이원에서 한다.

그뿐일까. 스키를 안 타도 모든 장애인에게 하이원의 설산정상은 열려 있다. 휠체어장애인, 시각장애인이 눈 덮인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설경을 편안히 감상하기란 글쎄…, 하이원 아니면 언감생심이다. 주차장과 산정을 잇는 동선 자체가 장애인을 위해 설계되고 시공돼서다. 그래서 하이원 스키장에 가면 감회가 남다르다. 광화문 계단 앞에서 체험한 그 난감함이 이런 뜻하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데서 느껴지는 가슴 뿌듯함이다.

요즘 지리산 등 국립공원 정상의 케이블카 설치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반대의 초점은 ‘환경파괴’고 찬성의 논지는 ‘관광입지’다. 어느 누구도 틀렸다고 나무랄 수 없는 건강한 토론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자연 접근권’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서다. 비장애인이야 케이블카가 없어도 그만이다. 그냥 오르면 되니까. 그러나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는 다르다. 그들에게 천왕봉은 오를 수 없는 불가능의 장벽이다. 그러나 천왕봉에서 해맞이할 권리는 그들에게도 똑같이 있다. 성숙한 사회란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회가 아닐지.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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