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기오]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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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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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1980년대 이후 오랜만에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20여 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초중등 학생의 인권이 주제이다. 한 달 전의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발단이다. 먼저 이를 한국사회의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반영하는 지표로 보고 싶다.

학생들 참여의 권리 간데없고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7년의 4차 교육개혁안은 학생체벌 관행을 개혁의제로 다룬 바 있다. 동 보고서는 당시에도 치열한 논쟁을 야기했다. 한편에 교육계, 다른 편에는 학부모를 중심으로 의견이 갈려 정면 대립했다. 이제는 논쟁 구도가 바뀌어 교육계 내에서 학생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 밖에서 이를 우려하고 걱정하는 상황이다.

필자는 1992년에 중앙정부 사무관으로서 유엔아동인권협약을 비준하는 과정을 마무리 지은 경험이 있다. 1980년대의 인권에 대한 국민적 관심에 비해 아동인권협약에 대한 당시의 무관심에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이 협약은 학생인권조례가 중시하는 인권실체적 학생인권보다는 학교의 모든 결정과 교육상 조치에 학생의 의견을 청취하는 적정 절차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정식 청문회 등 절차를 통해 이 학생들의 의견을 널리 수렴했다는 증거는 없다. 학생인권조례가 바로 그 주인공을 제외한 어른의 잔치가 아닌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초중등 학생의 불필요한 고통을 덜고 나이에 걸맞은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의 당면 과제임이 틀림없다. 높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 비해 아주 낮은 학생 행복지수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이며 세계 교육계에도 이미 잘 알려졌다.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언제나 오리무중인 것은 문제해결의 방법론이다. 필자의 첫 의문은 학생의 인권 문제를 교육조례와 같은 관료주의적 규칙으로 해결할지, 아니면 교직사회의 양식과 정화 역량으로 해결할지 하는 것이다. 규칙을 믿을까, 아니면 사람을 믿을까.

원칙적으로 좋은 규칙과 사회제도를 추구하는 일이 사람의 선의에 의존하는 방법보다 우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서도 과연 그러한가. 필자는 지금도 전국에서 땀 흘려 학생과 씨름하고 봉사하는 수많은 교사를 믿는다. 원래 교사는 규칙에 의한 강제나 보수, 기타 교육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일상에서 접하는 개개의 학생에게서 힘을 얻고 열심히 일할 동기를 얻는다.

교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수많은 내밀한 감정 교환과 상호작용을 안 해본 사람이 어떻게 알까. 교사와 학생의 긴밀한 관계에 학생 사생활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지방의회나 교육감 등 권력과 관청이 개입하는 것은 정말 경솔한 일이다. 학생인권조례의 가장 걱정스러운 점이 이것이다.

‘어른들의 잔치’ 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법률적 의문이 있다. 인권이란 헌법과 법률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례와 규칙의 문제인가. 답은 분명하다. 인권을 포함한 모든 법적 권리는 조례와 규칙으로 좌우될 사항이 아니다. 교장 교감 교사의 교육권능은 법률이 정하고 있다. 조례로 정하는 학생인권이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와 규칙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루지 않고 주민의 복리 문제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 인권이란 학생의 인권인 경우조차 지방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질서 문제이자 중요한 법률적 정치적 문제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순수한 교육 문제를 정치화하는 예상치 않은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교육계나 지방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법률가와 정치인이 밤새워 고민할 국가적 문제이다. 이들이 직무를 유기하는 동안 교육계가 이 문제를 껴안고 씨름하고 있다. 교육계의 순진함을 보여주는 전형적 장면이다. 정치인과 법률가의 맹성을 촉구한다.

정기오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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