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100년 전 나라 빼앗긴 날의 교훈 살아 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28일 03시 00분


1910년 8월 22일 창덕궁에서 열린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은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 조인을 위한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순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낸 이완용은 서울 남산 아래에 위치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통감의 관저로 찾아가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조약이 공포됐다. 이로써 500년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 땅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우리에게 영원히 씻겨지지 않을 굴욕적인 상처를 남긴 국치일(國恥日)이 내일로 100년이 된다.

우리는 나라를 왜 빼앗겼는지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자세로 이날을 맞아야 한다. 당시 제국주의 세력이 너도나도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조선이 세계 조류를 포착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고 외국의 침략을 용납하지 않는 국방력과 경제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더라면 국치는 없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내부 분열과 국가적 방향 설정의 혼란에 국제 정세 판단 미숙이라는 실책까지 겹치면서 조선은 순식간에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100년 전 이뤄진 한일병합조약이 불법적이고 강제적이었으며 따라서 원천 무효라는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다. 1905년 역시 강제적이었던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2만 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 왕조와 백성에게 위협을 가하다가 1910년 국권을 찬탈했다. 조약 체결의 당사자인 데라우치 조선통감조차 “군대와 경찰의 위력과 부단한 경비가 간접적으로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올해 5월 한일 지식인들은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은 한일병합이 한국인의 항거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면서 실현시킨 결과임을 명백히 밝혀냈다”는 선언문을 공동으로 채택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병합조약에 대해 ‘당시에는 유효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무효가 됐다’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조속히 원천 무효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 문제, 독도를 비롯한 역사 왜곡 문제 등 현안에 대해 성의 있는 자세로 해결에 나서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정착될 수 있다.

우리는 광복 직후 가장 가난한 국가로 출발해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뤄냈다. 그러나 현재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이 시점에서 100년 전과 오늘의 상황을 비교해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좌우 이념 대립이 심화하고 있는 것은 조선 말 ‘위정척사파’ ‘문명개화파’로 갈려 대립하던 내부 분열상을 그대로 닮았다.

부국강병이라는 변함없는 국가적 과제를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 경제는 2002년 세계 11위에서 2008년부터 15위로 내려앉았다. 게다가 중산층이 급속히 감소하며 양극화의 사회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놓고 이해(利害)를 다투는 일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국제 정세에 대한 현명하고 정확한 판단이 한 세기 전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의 치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그때의 교훈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살펴보고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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