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때론 돌아가는 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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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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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목표는 프로복싱 선수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성장한 소년은 고된 훈련을 감내한 끝에 고교 2학년 때 프로 선수 자격증을 땄다. 어느 날 그는 스타 선수의 스파링을 참관한다. 그때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저렇게까지 발전할 수 없을 거라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뼈아픈 깨달음을 얻는다. 권투를 하며 일생을 살겠다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는 즉시 링을 떠난다. 열정을 다해 몰입한 꿈을 잃은 상실감은 컸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 소리에 마음을 연 뒤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다시 매진한다.

삶의 우회로에서 발견한 새 길

풋내기 권투선수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건축가로 도약한 안도 다다오의 삶이다. 애당초 원했던 여정을 접고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 더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우리의 머리는 생각을 아무 쪽으로나 바꿀 수 있게 하기 위해 둥글다는 말처럼, 자신이 꿈꿔오던 여정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때 다른 길로 돌아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도 생활의 지혜임을 일러준다.

사진 회화 조각 영화를 넘나들었던 20세기 미술의 거장 만 레이의 여정도 곧바른 길로만 이어진 건 아니었다.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던 그는 자기 회화의 가치를 몰라주는 미국을 떠나 1920년대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화가로 먼저 인정받고 싶었으나 생계를 위해 유명인사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는 카메라를 돈벌이 수단이 아닌 자아를 표현하는 도구로 인식하게 된다.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는 전통적 사진 세계를 뛰어넘어 예술사진의 신경지를 열게 되었다.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은 소설가가 되겠다고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해도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으로 방황하던 나날 속에 여름방학을 맞은 스무 살 청춘. 고향집에 내려간 그는 우연히 선배작가의 소설을 한 자 한 자 공책에 옮겨 적는 일에 빠져들면서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직선코스에서 벗어나 잠시 숨고르기를 했던 그 순간. 이때를 작가는 훗날의 풍부한 자양분이 된 시간으로 떠올린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건 간에 그 지나간 것들은 오늘 여기까지로 오는 길이었으며, 여기 내 앞에 놓여있는 이 시간 또한 십년이나 이십년 뒤 짐작도 못 하겠는 그 시간들로 가는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신경숙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이들은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삶이 팍팍하다고 앙앙대는 우리를 향해 가끔은 정체나 퇴보같이 보이는 여정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회 전략(Oblique Strategies)’이란 작품을 만든 영국 아티스트들이 있다. 창작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고갈됐을 때 실마리를 푸는 다양한 전략을 담은 카드를 통해 유연한 자세를 강조한 작업이다. 문제가 얽힌 상황에서 정면돌파보다는 흥미로운 우회로를 찾는 것이 해결책이란 점을 알려준다.

“흐르는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

언제나 지름길이 최선의 선택인 것은 아니다. 자동차들로 꽉 찬 도로에서 경험하듯, 가끔은 조금 돌아가는 길이 우리를 더 빠르게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개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4대강처럼 요즘 한국 사회를 갈라놓는 이슈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냉큼 질러가는 길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새 해법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시인 장 루슬로는 흐르는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고 따스한 충고를 준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풀과 돌, 새와 바람, 그리고 대지 위의 모든 것들처럼/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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