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35년 전 패망한 월남이 생각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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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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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밤 천안함이 폭침당한 지도 5개월이 흘렀다. 어제 채명신 장군(84)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안보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물었더니 “베트남과 똑같다”고 했다.

천안함 5개월, 걷히지 않은 불안

1973년 1월 파리협정이 베트남전쟁에 마침표를 찍을 당시, 남베트남(자유월남)은 베트남 전체 인구의 90%를 관할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군사력 경제력과 국민생활 수준은 북베트남(공산월맹)을 압도했다.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월남군 화력은 세계 4위로 손꼽혔다. 월맹군은 거지군대였다.

종전 2년 뒤인 1975년 1월 월맹군 사단이 남베트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 달 뒤인 4월 30일 자유월남공화국은 월맹군과 베트콩(자유월남 내 공산세력)에 항복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965∼69년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 장군은 ‘베트남전쟁과 나’라는 회고록에 “후배들과 후대 우리 국민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바로 ‘월남의 패망을 교훈으로 삼아야 된다’는 절규”라고 썼다. 그는 월남 패망 요인으로 첫째 ‘공산월맹의 실체와 음모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153일 전의 천안함 비극은 청와대부터가 ‘북이 우리한테 도발할 수 있겠어?’ 하며 방심하고 있다가 어뢰 한 방에 당한 패전이다. 10년 좌파정권은 북한의 실체와 음모를 제대로 알려고 하기는커녕 지난날 어렵게 구축해 놓았던 대북 정보 공작망까지 스스로 파괴하고 고장내버렸다.

채 장군은 남베트남 패망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더 꼽았다. “둘째, 베트콩들이 교묘한 모략과 이간책으로 월남 국민들의 반미감정을 격화시키면서 미군철수를 부르짖게 했다.” “셋째, 월맹 스파이들이 월남 대통령 측근을 비롯한 모든 기관과 종교 학계 언론 문화 예술 등의 조직에 침투해 선전모략, 이간책,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혼란 상호불신 반목 불만을 격화시켰다.” “넷째, 정치 지도층, 권력층 등에 만연한 부패가 베트콩의 활동과 세력 확장에 더없는 조건을 제공했다.”

1975년 1월 월맹군이 남침할 당시 월남 수도 사이공에서는 반정부 반미 데모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월남 정권들은 대공(對共)정보기관을 약화시켰고 스파이 검거에서도 손을 놓았는데, 이 또한 베트콩과 월맹의 조직적 공작에 놀아난 흔적이 있다.

1973년 미군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 유사시엔 지원한다’고 문서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월남의 반미세력에 내몰리다시피 철군한 데다 그 후에도 반미데모가 끊이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특권과 부패가 安保흔든다

한미연합사의 전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전환되고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더라도 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한미동맹 합의는 확고할까. 미국이 질색을 한 노무현 정권 같은 정권이 또 들어서고, 한미 간 신뢰가 무너진다면 미국의 한국 방어 의지는 변할 수 있다.

물론 ‘미국만 쳐다보는 안보’도 문제다. 천안함 폭침상황을 맞은 뒤, 우리 정부와 군은 ‘미국 또는 미군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 많은 국민에게 의문을 품게 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을 굳건하게 복원시키지 못했다면 중국이 우리나라를 더 거칠게 쥐고 흔들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과 미군만 쳐다보아서는 5년 뒤, 10년 뒤, 50년 뒤, 100년 뒤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

무원칙한 사면, 특권층에겐 역시 반칙이 통한다는 사례의 누적, 권력을 사유물인 양 돌려가며 나눠 먹는 행태는 부패의 일종이다. 국민은 대통령의 측근 누구에게도 권력을 공깃돌처럼 쓰라고 준 적이 없고, 대통령에게도 권한 오남용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주권재민(主權在民) 원리를 망각하고 권력이 원래 자신들의 것인 양 착각하며 ‘특권과 반칙’을 일삼으면 국민이 언젠가는 벌주는 시스템이 민주주의다.

이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정의 키워드로 제시한 ‘공정한 사회’는 말 그대로 구현돼야 민심이반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민심이 정부를 신뢰해야 튼튼한 안보도 가능해진다. 정부에 대한 미움과 반발로 친북 종북(從北)에 가담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하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국무위원 후보자들을 비롯해 선택받은 사람들의 반칙과 부패는 ‘공정한 사회’ 비전을 냉소거리로 전락시키고 정권 재창출과 안보 강화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게 한다. 이 대통령이 가끔 강조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정권 안에 살아 있다고 다수 국민이 믿을 수 있어야 안보 컨센서스도 확장된다.

어떤 사람들은 “베트남과 똑같다”는 채 장군에게 “지금의 한국과 그때의 베트남은 한참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35년 전 월남 지도층도 ‘설마’ 하다가 무너졌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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