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非主流박근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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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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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9일 전남 구례 농협교육원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마지막 토론자로 박근혜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유신에 대해 사과하라고 저한테 말하는 분들은 열린우리당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대표 흔들기다.”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 비주류 측이 박 대표의 과거와 리더십을 문제 삼으며 면전에서 비판한 데 대한 정면 반박이었다.

6년이 흐른 2010년 8·8개각은 지금 한나라당 정권의 주류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정권 2인자’로 불리며 재·보궐선거에서 부활한 이재오 의원은 특임장관에 내정돼 정권 재창출의 핵심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했다. 김태호 전 경남도지사가 48세에 국무총리로 지명된 것은 여권 차기 경쟁구도를 흔들 조짐이다. 친이(친이명박)계는 주요 장관직에도 전면 포진했다.

8·8개각이 정권 주류 측의 ‘박근혜 포위’ 또는 ‘박근혜 포기’를 확실하게 가시화했다는 풀이도 여권 일각에서 나온다. 박 전 대표가 대운하 건설 반대에 이어 6월 29일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국회 본회의 표결 때 직접 반대토론에 뛰어든 것을 놓고 정권 핵심부에선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무렵 친박(친박근혜)계 일각에서 균열이 생겼다. 친박계 좌장 격이던 김무성 원내대표가 박 전 대표와 사실상 결별했다. 한때 박 전 대표와 남다른 신뢰관계였던 진영 의원도 친박계에서 이탈했다. 박 전 대표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20% 중반대까지 떨어졌다. 박 전 대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열대야가 계속돼 참으로 힘든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정치판에는 영원한 주류도, 영원한 비주류도 없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주류였던 민주계는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등 대권을 꿈꿨던 인사들이 영입인사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에게 나가떨어졌다. 집단적 연명을 도모했던 ‘정치발전협의회’는 몇 달 못가 공중분해됐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정권의 주류였던 동교동계의 한화갑 전 대표는 노무현 돌풍에 밀려 고향인 광주에서 3위를 하고 대권 꿈을 접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민자당에서 소수 비주류였음에도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박 전 대표가 그 YS 모델을 추구할 수도 있다. 3당 합당 직후 YS 직계인 민주계는 당내 세력의 30% 정도에 불과했지만, 다수파인 민정계에게 “죽을래? 살래?” 윽박지르다시피 하며 빠른 속도로 세를 확대했다. 문제는 박 전 대표가 YS의 ‘군사독재 청산’ 같은 시대적 명분을 쥘 수 있느냐다. YS는 민주화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정치적 재산을 스스로 일군 정치인이었다. 박 전 대표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뛰어넘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희생’을 입증해 보여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이제 박 전 대표는 시험대에 섰다. 2012년 대회전(大會戰)에서 비주류의 처지를 주류로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압도적 1위라는 지금까지의 상대평가에 자신을 계속 가두어두고 있을 수 없다.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대세론에 안주하다가 한순간에 무너진 이인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친이 쪽도 리스크는 있다. 박 전 대표 끌어안기에 실패함으로써 여권 분열과 대선 패배의 길을 갈 수도 있다. 2012년을 향한 여권의 예선전이 점점 볼만해지고 있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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