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부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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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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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원하는 거야? 돈인가?” “아뇨. 평등한 사회입니다.” “평등?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실현하려는 거죠.”

더위를 피해 볼까 별 생각 없이 집어든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소설 ‘올림픽의 몸값’의 한 대목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맞아 외국인들에게 자랑할 모습을 내보이겠다며 온 국민이 도시를 급조하던 때. 궁핍한 농촌 출신의 도쿄대 경제학부 대학원생 구니오는 도시 막노동자인 형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밑바닥의 비참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올림픽 개최 방해를 무기로 정부에 돈을 요구한다.

가난한 이들의 생존 향한 몸부림

중국 소설가 자핑아오의 ‘즐거운 인생’은 화려한 고층건물이 즐비한 시안으로 올라온 시골청년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무섭게 치닫는 중국의 경제부흥과 빈부격차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바꿀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으면 적응해야지. 적응할 수 없으면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관용을 베풀 수 없으면 포기하는 거야.” 신장 하나를 팔고 도시로 와서 고물장수가 된 가오싱은 ‘큰 나무 앞에서도 풀잎은 비굴해하지 않는다’며 남루한 일상을 꿋꿋이 이겨내려 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 버렸다’(이재무의 ‘가난에 대하여’)

두 작품은 남들 위에 선다는 것이 겸허해야 할 일임을 느끼게 한다. 빌 게이츠는 세계은행이 발행한 보건의료분야 투자에 관한 두툼한 보고서를 읽고서 지구촌 격차를 바로잡고자 나섰다지만,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부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해 보는 일은 약간의 교양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부(富)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통제할 수 없는 특정 상황과 환경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 환경이란 여러분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의 주요 구성물에 불과하다.” 사실 셈이 정확한 부자는 알고 있을 터다. 일이 잘 풀려 능력만큼 또는 능력에 비해 훨씬 잘할 때도 있지만 때론 결과가 노력과 능력에 턱없이 못 미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도도하게 번지는 기부와 자선사업의 새로운 흐름을 다룬 책 ‘박애자본주의’에 따르면 J D 록펠러의 자선사업 고문은 세계 최초의 억만장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재산을) 불어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나눠줘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재산은 당신과 당신 자녀들, 그리고 당신 자녀들의 자녀들을 망가뜨릴 겁니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무거운 유산상속세를 옹호하며 이를 ‘이기적인 백만장자의 가치 없는 삶에 대한 국가의 징벌’이라 칭하고, 투자와 기부활동에 두루 능한 워런 버핏이 가문의 부를 물려받은 이들을 ‘운 좋은 정자 클럽의 멤버들’이라고 비아냥거린 이유가 그래서였나.

그 상처와 분노 보듬지 못한다면…

‘쓰레기 도시’로 불리다 올림픽을 통과하며 오늘의 세계적 도시로 자리 잡은 도쿄. 이어 사반세기 지나 개최한 올림픽의 열기로 20년 남짓 만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서울. 서울 이후 20년 만에 올림픽을 치르고 자본주의 실험을 고조시키고 있는 중국의 도시들. 어디서나 살아남기를 향한 욕망은 분출한다. 그것이 덜 야비한 모습으로 노출되게 하는데 저마다의 책임이 따르겠지만 부자의 몫은 이 경우에도 더 큰 것 아닌가 싶다.

주어진 틀을 원망 없이 받아들이는 가오싱과 자신이 몸담은 사회 체계를 파괴하려는 구니오. 그들의 깊은 상처와 분노를 보듬을 수 없는 공동체라면 그 누가 발 뻗고 잘 자격이 있을까. ‘배고픔’은 참아도 ‘배아픔’은 절대 못 참는 사회라면 더더욱.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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