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모럴 해저드의 罰’ 그리스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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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0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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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20일, 그리스의 갓 출범한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정부가 폭탄선언을 했다. ‘전(前) 정부가 관광 및 해운산업의 저성장과 방만한 지출로 생겨난 심각한 재정적자를 감춰 왔다’는 폭로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그제 그리스에 대한 300억 유로(약 43조 원)의 구제금융 제공을 우선 승인했다. 그리스가 3년간 IMF와 유로존(유로 통화 사용 16개국)에서 받을 구제금융은 1100억 유로(약 162조 원)에 이른다.

6개월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그리스의 경제위기 대응이 시원치 못했다. 신용평가회사와 EU, IMF의 압박에 따라 재정적자 감축목표를 계속 높여 가는 계단식 대책을 쏟아냈지만 역시 높아져 간 국제금융시장의 기대엔 못 미쳤다. 구조조정의 대상이자 주체인 공공노조연맹(ADEDY)과 타협하지 못하면 구조조정 의지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유로존의 굼뜬 대처도 위기를 키웠다. EU 경제의 두 축인 독일과 프랑스는 도덕적 해이를 우려해 그리스를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은행들이 그리스 정부와 기업에 1200억 달러(약 136조 원)를 빌려주거나 투자해 물린 것으로 드러나자 부실의 전염을 우려해 지원에 나섰다. 그리스가 국가부도를 내면 위기가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재정적자 규모가 큰 유로권 나라들로 번질 수밖에 없다. 최소한 그리스의 국가부도를 막아줄 수밖에 없었다면 구조조정 압박과 함께 지원을 더 서둘렀어야 했다.

애초에 그리스를 유로존에 받아준 것부터가 잘못됐다. 1999년 유로 출범에 앞서 독일 경제학자들은 몇몇 국가들이 사실상의 회계 조작으로 가입요건을 충족시켰고 재정적자를 겁 없이 방치해 유로의 안정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스는 군사비 일부를 감추고 재정적자를 줄여 신고해 2001년 유로존에 가입했다. 회원국들에 엄격한 재정관리를 요구하지 못한 것은 유로존의 실책이다.

그리스는 ‘유로존 회원권’ 덕에 호화생활을 한 셈이다. 높은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환율을 올려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는 노력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유로 덕에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저금리 차입으로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했다. 장기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 마련한 돈으로 재정사업을 펴 성장률도 높였지만 결국 독약이었다. 겉보기에 잘나갔으니 국민에게 개혁을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리스는 거품 위의 경제를 과대평가하고 위험 대비를 하지 않았다. 연금을 임금 대비 95%나 지급했는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고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의 14%에 이르는 탈세도 방치했다. 공공부문 취업자가 전체 취업자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로 비대해졌다. 고비용 저생산성 정부가 따로 없다. 그리스가 자국 통화를 계속 썼더라면 일찍 터졌을 문제를 유로화가 덮어준 셈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부패에 물들었다. 폐단이 깊었던 만큼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뒤에 허겁지겁 시행하려는 증세(增稅)와 공공부문 임금 삭감 등 가혹한 구조조정도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세계은행의 ‘2010 비즈니스 환경보고서 그리스 편’에 ‘그리스병(病)’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스의 ‘기업하기 좋은 여건’은 183개국 중 109위였다. EU 27개국, OECD 29개국만 따지면 꼴찌다. 창업 여건은 140위, 투자자보호 수준은 154위다. 그리스는 재정적자만 줄이는 게 아니라 ‘그리스병’도 함께 고쳐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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