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하나를 위한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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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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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는 법정 스님의 유언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도 동반했다. 스님의 책 중 희귀본 값이 뛰어오른 것이다. ‘일단 사놓고 보자’는 식의 충동구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스님의 뜻과는 상반될 일이지만, 기자도 ‘법정 스님의 책을 구해두려면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이 남긴 책 목록을 정색하고 살펴봤다. 유독 한 책 제목에 눈이 멎었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라는 제목이었다.

10여 년 전 영화 ‘트루먼 쇼’를 깊이 공감하며 봤다. 영화 초반, 주인공 트루먼이 마을 중심부를 지날 때 광장 한가운데 열주(列柱) 모양의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열주를 잇는 가로보에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초보 라틴어 실력으로도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뜻임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집약한 말이기에 감탄과 함께 미소가 떠올랐다.

법정 스님이 책에서 다룬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란 가르침은 자기로부터 출발해 세상과 타인에게 도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큰 생명에서 나온 존재이며,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라는 가르침이었다.

트루먼 쇼가 제시하는 ‘전체와 하나’는 이와 사뭇 다르다. 영화 속에서 ‘하나를 위한 전체’는 리얼리티 쇼 주인공인 트루먼을 위해 일상사 하나하나를 연기하는 출연진이다. ‘전체를 위한 하나’는 출연진의 생계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꼭두각시 주인공이 된 트루먼 바로 그다. 법정 스님에게 ‘한 사람’은 지구상을 가득 채운 낱낱의 생명이지만, 트루먼 쇼에서의 ‘하나’는 말 그대로 단 한 사람에 모인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라는 구호가 통용되는 사회가 또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70분이면 닿는 전체주의 사회다. 어린이들이 집단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익히는 원칙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이 사회의 노동법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에서 서로 이끌면서 공동으로 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는 낱낱의 개별자일까, 하나의 절대자일까.

북한 체제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북한의 경제 재정 운영 중 20%는 김정일이 자유로 사용하는 예산이고, 50%는 군비이며, 인민의 생활에 돌아가는 돈은 30%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민 생활에 돌아가는 몫이 김정일 ‘사비’보다는 많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간신히 싹트던 시장경제의 숨통을 죄다 전 사회가 질식하고, 핵무기를 개발해 전 세계를 위협하는 일은 ‘하나’를 위한 것일까, ‘전체’를 위한 것일까.

영국 시인 존 던의 ‘누구도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라는 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 모두에게 통용되는 진리다. 전체가 하나의 역량에, 하나가 전체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사실은 체제와 시대의 다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하나’는 사회를 떠받친 구성원 각각을 뜻하고 그 각각의 복리를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어떤 체제의 ‘존엄’도 공염불일 뿐이다. 전체주의의 마성을 경험한 루마니아의 문호 콘스탄틴 게오르규도 장편 ‘키랄레사의 학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다. 성령도 개개인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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