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안덕근]정부 R&D지원과 불법보조금 사이

  • Array
  • 입력 2010년 3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최근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국가연구개발 시스템을 대폭 개편했다. 산업기술 육성을 책임지는 지식경제부가 8일 시장친화적인 경쟁체제 수용을 천명하면서 기업의 전문가를 포함하는 연구개발전략기획단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산업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 투자의 방향과 관리를 전략기획단에 위임하고 10대 미래산업 기술 개발에 향후 7년간 민관 합동으로 3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작년 6월에는 기초기술을 책임지는 교육과학기술부가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으로 흩어져 있던 연구지원 기능을 통합하여 한국연구재단을 출범시켰다. 인문사회와 자연과학 구분 없이 통합된 연구지원 체계를 수립하여 일관성과 효율을 증진하자는 취지이다. 연구개발 체계의 통합과 개편은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기술역량을 배양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에 따른 통상마찰의 문제이다.

정부는 2000년 초반 차세대 성장동력 사업을 추진하면서 기존 산업정책 차원의 지원을 기술역량에 초점을 둔 연구개발 지원으로 대폭 전환했다. 문제는 우리 연구개발 지원체계가 과도하게 상용화 기술에 경도되면서 이미 교역상대국과의 통상마찰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연구개발 보조금에 대한 규제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상용화 기술, 통상마찰 부를 수도

WTO에서 연구개발 지원이 최초로 문제가 된 것은 1998년 브라질과 캐나다 간에 중형항공기산업 지원에 대해 WTO 분쟁이 제기됐을 때다. 약 5년간 소송이 이어지면서 첨단산업부문에 대한 정부 지원의 합법성을 두고 첨예한 분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상당 부분의 양국 정책이 불법적인 보조금으로 판정 났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캐나다 정부가 시행하던 대표적인 국가연구개발사업이 항공산업을 위한 수출보조금으로 판명되면서 WTO가 이를 금지한 점이다. 이 판정으로 캐나다는 관련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절반 이상을 재편하는 수난을 겪었는데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에 의존하던 수많은 사업과 업체들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WTO는 4월 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통한 연구개발 지원과 유럽연합(EU)의 다양한 연구개발정책이 항공산업에 대한 부당한 보조금에 해당하는지를 판결할 예정이다. 이 판결은 WTO 회원국의 연구개발 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는데, 특히 한국은 최근 공을 들이는 항공우주산업 분야 지원체계뿐만 아니라 연구개발정책의 전반적인 시행구조를 재점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개발정책에 따른 통상마찰은 우리에게 낯선 문제가 아니다. 2003년 미국 정부가 하이닉스에 상계관세를 부과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한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특히 미국의 상계관세 부과는 이후 EU와 일본의 상계관세 부과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고 한국 정부가 이들 국가를 모두 WTO에 제소하면서 지금까지도 최대의 통상분쟁 사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 간과된 부분이 연구개발지원에 대한 불법보조금 판정이다.

미국 상무부는 과학기술부 주관으로 시행된 차세대반도체사업과 21세기 프런티어 연구개발 프로그램에 따른 반도체 기술 개발지원이 모두 불법적인 보조금이라고 판정했다. 그런데 이 판정은 막대한 수출량과 기술료 지불 규정 때문에 상계관세가 거의 0%로 산정되면서 우리 정부와 산업계의 관심 대상에서 제외됐다. 명심할 부분은 2000년 초반에 기초기술 주무부서인 과기부의 연구개발지원사업이 미국에서 상계가능 보조금이라고 판정된 점이다. 과기부 사업이 이런 판정을 받는 판국이면 산업육성을 담당하는 여타 부서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구 중도하차 없게 사전 검토를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 연구개발 지원체계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교과부에서 발간하는 2009년 국가연구개발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이 수행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08년 약 20%에 이른다. 또한 기초연구가 1.2%에 그치는 반면에 상용화를 전제로 하는 연구개발은 85.6%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 정부의 연구개발은 기본적으로 상용화를 최우선 과제로 하는데 이것이 국제통상마찰에 취약한 근본적인 이유다. 따라서 연구개발 지원체계를 재편하고 시행구조를 개선하는 데에 국제통상규범 차원의 신중한 검토가 수반되어야 한다.

무역관계에서 야기되는 통상마찰 때문에 국가의 대계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기술역량 배양의 영역에까지 국제규범과 의무가 부과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이를 수용하는 좀 더 합리적인 연구개발 지원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기술배양 단계의 연구개발 전략과 기술활용 단계의 국제통상전략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거시적인 전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