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덕민]국군포로 송환, 남은 시간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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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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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있는 미 육군 중앙신원확인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관계자는 마침 북한지역에서 실종된 미군 유해를 수습했다면서 신원확인 중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금속테이블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백골이 안치돼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병들의 시신이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이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생전에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을 타국 땅에서 죽어야 했는지. 살을 에는 듯한 개마고원의 추위 속에서 산화한 그들이 있었기에 1·4후퇴가 가능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13만 용사 유해 발굴만큼 큰 문제

관계자의 브리핑은 계속되었다. ‘그들(실종미군)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세계 어느 곳이든 미국은 찾아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질문을 했다. 한국군도 미군과 같이 싸운 전투가 많은데 한국군의 유해를 발견한 적은 없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관계자는 베트남 정글에서 미군 헬기 잔해와 함께 한국군 장교의 시신을 수습했고 신원을 파악 중이라고 했다. 감사했지만 부끄러웠다. 아니 조금 화가 났다. 미군 헬기를 타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35년간 베트남 정글에 방치되었던 박우식 소령은 2002년 여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 나는 아버지와 격전지를 여행한 적이 있다. 어느 전승기념비 앞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개전 초기 한국군은 도망 다니기 바쁜 군대였다. 전사한 전우의 시신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전우의 시신이 방치되고 자신도 그럴 운명이라는 상황에서 병사에게 싸울 의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미군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군 전투력의 원천이 그것임을 깨달은 한국군도 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한국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용감한 부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산하에는 13만 참전용사의 유해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딘가에 묻혀 있다. 망자도 문제지만 사실 산 자들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7만4000명에 이른다. 더욱이 1994년 조창호 소위가 탈북하기 전까지 그들은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그들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초를 겪고 있다. 대부분 가장 위험한 탄광의 발파공이었으며 나이가 들면 벌목공으로 내몰렸다. 일부는 시베리아의 사지로 내몰렸다. 노예와 같은 생활이다.

포로 가족이 겪은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다.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의 입을 통해 우리는 560여 명의 생존을 확인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그들을 방치하면서 과연 우리의 젊은 병사들에게 나라를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간이 없다. 그들의 나이는 거의 팔십을 넘기고 있다. 앞으로 수년 내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국민 관심 모아 귀향 기적 일궈야

우리는 1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 비전향 장기수 64명 전원을 북한에 송환할 정도로 통 큰 인권정책을 취했지만 정작 남북관계를 위해 자국민의 인권, 그 가족의 인권은 외면한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명박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의 해결을 남북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과거 서독처럼 북한에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국군포로를 송환받는 방식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일본 국민의 높은 관심은 납치된 일본인을 집으로 오게 하는 기적을 낳았다. 국군포로,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그들에게 너무도 많은 빚을 지었기 때문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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