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문정희 시인]하얀 추억 ‘러브 스토리’를 보내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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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뜻밖에도 고통의 감각으로 다가든다. 그리고 첫눈처럼 나를 둘러싼 도시와 골목들을 눈부시게 만들고 어느 날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멀리 런던에서 한 작가가 타계했다는 소식은 깊이 잊고 있던 어떤 감정 하나를 생생하게 깨워 놓았다. 고양이처럼 아픈 신음을 내며 일어서는 감정, 그것은 눈이 녹고 그 실체를 드러낸 현실처럼 앙상하기만 했던 나의 마음을 잠시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반복할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 우리들 청춘의 한가운데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는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 작가를 특별히 문학의 범주에서 기억한 적도 없고, 그 소설 또한 영어공부를 위해 한 쪽에 원문이 붙은 책으로 읽었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인데도 소설과 영화의 장면은 나의 젊은 감수성 속을 떠도는 어떤 음유시였음에 틀림없다.

“스물다섯의 나이로 죽어간 그녀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아름답고 영리했으며 모차르트와 바흐와 비틀스를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러브 스토리’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처녀와 부잣집 아들, 그 둘 사이를 백혈병이라는 장치로 갈라놓음으로써 사랑의 유한성을 더욱 가열시키고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전형적인 신파 구조의 소설이다.

기실 인생은 다소 신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미처 알지 못했는데도 하버드대 캠퍼스의 활력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의 눈싸움과 감미로운 영화음악만으로도 그 스토리는 내 청춘의 배경에 띄워진 꿈의 신기루였음에 틀림없다.

그해 겨울날,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한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사의 여운은 생각보다 커서 종로인지 동숭동인지 어디쯤에 있는 석벽을 뚫어 만든 카페 ‘알타미라’에 당도할 때까지 서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알타미라’는 동굴처럼 깊고 아늑했지만, 천장에 걸린 알전구의 불빛이 누추한 젊음을 낱낱이 투시하여 눈이 부시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탄성처럼 흰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말았다. 폭설은 순식간에 세상을 백색으로 뒤덮어 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뭉쳐 서로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눈싸움이었지만 ‘러브 스토리’ 때문인지 눈 뭉치는 어떤 고백보다 강렬한 고백으로 서로를 강타했다.

그날 밤처럼 아름다운 눈 뭉치는 그 후로는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 몇 년 전에 뉴욕에 가서 혼자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물론 눈 내리는 날이었다. 사랑의 선율 속에 눈 뭉치를 던지던 올리버와 제니는 어디로 갔을까. 오만한 뉴요커들이 곁눈조차 주지 않고 조깅을 하고 있는 공원 숲 속에 지난 가을 낙엽들이 기억처럼 썩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더러운 도시 쥐들이 먹이를 찾아 절름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 청춘의 물안개가 완전히 걷혔음을 확인했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숨기지 말고/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올겨울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는 십수 년 전의 내가 청춘의 직설어법으로 쓴 ‘겨울 사랑’이라는 시가 몇 구절 걸려 있다. 눈송이처럼 가서 만나고 싶은 이 시 속의 너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반복할 수 없는 내 청춘의 열정! 그를 목메어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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